육아에세이 26편
아이가 펜으로 한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미덕통장'이라는 걸 가져왔는데, 일주일 동안 아이가 한 다양한 행동에 미덕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었다. 열정, 끈기, 배려, 사랑, 존중 등 같은 미덕을 세 개 모으면 보석 하나를 주는 게 이 칭찬게임의 룰이었다. 아이가 직접 써보도록 격려해달라는 문구도 안내되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래서 먼저 아이의 행동을 곰곰히 생각해서 기록해두었다가 아이에게 물었다. "이 행동은 어때?" 내가 어떤 행동을 쓸지 제안하면 아이는 "좋아"로 수긍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조금씩 수정을 해나갔다. 이를테면 "카봇 변신을 계속해요"를 내가 열정 카테고리로 제안하면 "로봇 변신을 도전해요"로 변형하는 식이었다. "글자를 계속 읽어요"는 "글자를 바르게 써요"로 적극적으로 바꾸겠다고 표현하면서 스스로 글자를 펜으로 한자 한자 적어가는 게 아닌가.
사실 그동안 어린이집 특별활동 한글수업에서 연필로 자음모음을 쓰는 연습을 한 흔적이 있는 책자를 보기도 했다. 집에서는 태블릿학습기로 손으로 한글을 따라쓰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집에서 직접 펜으로 글자를 쓰는 연습을 시켜진 않았다. 어린이집에서 충분히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고, 아이도 스스로 색연필을 들고 우리이름, 본인이름을 쓰며 우리를 기쁘게 해준 적이 있었기에. 우리가 주문하지 않아도 하고 싶어지면 할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예기치않게 직접 눈앞에서 아이가 어엿하게 펜으로 글자를 한자 한자 써내려가는 모습을 마주하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고개를 위로 들고 한글자를 어떻게 조합하는지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얼굴 표정, 한손은 종이를 고정하고 또 한손은 펜을 공손히 부여잡고 힘주어 잡는 손 자세들이 내 눈에 오래토록 고정되어 맺혔다. 꽤나 자주 써주던 색종이 위에 공룡이름들과는 왠지 달랐다. 자신의 행동을 직접 스스로 써내는 것이어서 그랬을까. 비로소 아이가 한글의 세계에 속하기 시작했다는 실감이 났다.
아이가 한글에 관심을 갖고, 스케치북에 자모음의 모양을 거꾸로 쓰던 시절이 생각난다. ㄷ자의 열린 부분이 오른쪽이 아닌 왼쪽을 향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는데. 그 불완전하고 자유롭던 세계는 이제 닫혀가는 것일까. 아이가 쓴 미덕통장의 글씨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직은 ㄹ자의 좌우가 바뀐 글자가 보이는 것에 안심하는 내가 있다. 완전함, 완벽한 글자모습을 추구하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 모습보다 불완전하게 흔들린 글자에 더 눈이 가고 그 모습이 영원히 남아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내가 숨어 있다. 아이는 이런 내 마음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지.
아이의 글씨와 마주한 순간, 아이의 고유하고 불완전해서 아름다웠던 시간들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 시간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바라는 건 너의 성장, 자립과 반대되는 일이겠지. 그 불완전함이 사라져가는 게 아쉽다고 하면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완전함을 추구해가는 과정에서, 불완전해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던 아이의 자유로움이 우리를 많이도 웃게 해주었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아이가 자신의 불완전함에 마음 아파하는 시기가 온다면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어졌다. 너의 그 불완전한 자유로움를 사랑했다고. 너도 그 순간들을 사랑하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