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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의자 Jun 24. 2020

맹신자들

에릭 호퍼

세상을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이 가진 위험성을 알고 있지만, 때로는 복잡한 논리나 사설을 빼고 주제를 명확히 제시하는 글에 끌릴 때가 있다. 굳이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걸러서 읽어줄 텐데도 작가의 노파심은 전후좌우 이전이후 맥락을 모두 말하고 싶어 한다. 나 역시 그런 삼류에 속한다. 그런 면에서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은 매력적인 책이다.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에서 작가는 군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간단하고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 ‘맹신자’는 어떤 이념이나 종교를 배타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절대적 진리를 소유했다는 확신 아래 누군가를 배타적으로 규정하면서 극악무도한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맹신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진리 외에 다른 진리가 없다는 점을 굳게 믿는다. 그들은 그 진리가 개인이 아닌 집단 운동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고 믿으며 개인으로서의 자기보다는 집단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호퍼가 보기에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나치 운동, 일본 군국주의, 시오니즘, 이슬람 근본주의는 대표적인 맹신자들의 대중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에 쉽게 빠져드는 맹신자들은 주로 ‘좌절한 사람들’이다. 좌절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어떤 대상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종교든 혁명운동이든 민족운동이든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호퍼에 따르면 광신적 공산주의자가 광신적 애국주의자나 광신적 가톨릭 신도로 바뀌는 일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맹신자에게는 집단의 대의명분이나 이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일이냐 아니냐가 문제일 뿐이다.      


맹신자들의 집단은 강하게 결속되어 있다. 그 안에서는 자기희생이라는 이타적인 속성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호퍼는 맹신자들의 자기희생에는 어떤 획일적인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좌절된 자들의 자기혐오인데,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거부하고 하나의 조직에 완전하게 하나가 되려 한다. 그에게는 조직이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어떤 신념이나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건다고 해서 모두 고귀하다고 볼 필요는 없다. 무엇을 위해서인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좌절한 사람들의 종류도 다양하다. 호퍼는 가난한 사람(신생 빈민, 극빈자, 자유를 얻은 빈민, 창조적인 빈민 똘똘 뭉치는 빈민), 부적응자, 이기적인 사람, 무한한 기회를 눈앞에 둔 야심가, 소수자, 권태에 빠진 사람, 죄인 등을 맹신자가 될 가능성이 큰 사람들로 꼽는다. 이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변화를 갈망한다는 데 있다. 물론 좌절한 사람이 아니어도 맹신자가 되거나 군중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식인들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호퍼는 좋은 대중운동과 나쁜 대중운동을 구분하기도 한다.      


군중에 대한 분석으로는 르봉의 <군중심리>나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이 잘 알려져 있다. 대중 운동이 가진 속성을 자신이 경험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분석한 좋은 책들이다. 하지만 이 책들의 언어는 답답하고 조심스럽다. 그런 면에서 나는 <맹신자들>의 선명함이 더 좋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다음의 말들에 호퍼는 동의할 것 같다. 열정에는 선도 악도 없다. 권력에 대한 탐욕은 힘이 아니라 약함에 뿌리박고 있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들은 늘 무고한 다수의 죽음을 앞세운다.      


이 미친 시대에도 나는 아직 이성주의자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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