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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의자 Jun 24. 2020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로 시작하는 시가 있었다. “빈집”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떠나보내는 시인의 슬픈 이별 의식이었다. 시인이 이별을 고하는 대상은 ‘짧았던 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 ‘공포를 기다리던 종이’,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이었다. 이것들은 젊은 시절 시인의 온갖 감정을 대신하던 시간, 공간, 친구들이었다. 긴 밤과 새벽 촛불을 켜 놓고 시인은 종이 위에 무엇을 썼을까. 말하지 못하는 공포를 종이에 옮겨 적고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리라.      


우리들은 모두 한때 소중히 여기던 무엇과 이별해야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이루고자 했던 꿈일 수도 있다.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열정이라고 해도 좋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우리를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 스스로 그것들을 떠나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도 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면서 자의로든 타의로든 과거를 지우고 살아간다. 나는 서른을 앞두고 이 시가 실려 있는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었다. 그때 현실에 대한 절망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시인만의 것이 아니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한 마디로 암울하다. 시인이 살아가는 시대나, 그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시인의 내면 모두 어둡고 우울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세상은 그에게 고통스러울 뿐이며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굴러간다. 그가 슬픔을 이야기하기 전에 세상이 먼저 슬펐고 아픔을 이야기하기 전에 주변에는 아픔이 퍼져 있었다. 그 속에서 시인은 한 번도 나를 내세우지 못하고 낡고 죽은 것들을 만나며 살아간다. 그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독서는 고작 죽은 자들과 만나는 일이며, 그가 살아가는 도시는 죽음으로 가득하다.      

  

시들에 담긴 암울한 전망은 시인 기형도의 비극적인 삶을 떠올리게 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모순으로 가득한 대학 생활,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자아는 이 시집에 빈번히 등장하는 제재이다. 데뷔작인 “안개”의 더러운 도시에서는 어두운 사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다. “대학시절”에서 시인은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던 슬픈 대학을 떠나기가 두렵다고 말한다. “엄마 생각”은 동시 느낌을 주고, “입 속의 검은 잎”은 초현실적이며, “포도밭 묘지”는 서사를 느끼게 하지만 이들 모두 어두운 그림자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 시집은 1980년대 끝자락에 출간되어 1990년대 초반 젊은이들의 정서를 지배했다. 세상과 만났을 때 개인의 내면은 초라하고 누추해지기 쉽다. 낯선 대상과의 만남 자체가 주는 두려움과 공포 역시 작지 않다. 기형도 시의 화자는 이러한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의 시에는 세상이 별것 아닌 것처럼 잘난 체하는 포즈가 없다. 그러면서도 시대나 주변이 주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비겁하지 않지만 용감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그가 감지하는 세상은 우리가 굳이 피하고 싶어 하는 현실이며, 젊은이들을 암울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 생각해보면 젊은이로서 절망을 경험해보지 않은 자 누가 있겠는가. 최소한 우리는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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