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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의자 Jun 24. 2020

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럴 오츠

<곡성>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오랜만에 공포 영화를 본다는 기대감으로 극장에 갔지만 조금은 황당한 기분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귀신들이 조용한 시골 마을을 초토화시킨다는 내용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귀신의 다양성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한국 귀신, 일본 귀신, 서양 귀신이 섞여 수시로 등장했다. 그중 한복을 입은 한국 귀신이 착한 편이었고 일본 귀신이 제일 못 됐으며 서양 귀신 좀비는 뜬금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부산행>이라는 영화가 나왔다. 본격적인 좀비 영화였다. 드디어 우리나라도 좀비를 대량 수입했구나 싶었다.      


좀비Zombie는 살아 있는 시체를 이르는 말로 아이티의 민간 신앙인 부두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부두교의 사제는 시체를 다시 움직이게 만들거나 살이 있는 인간의 영혼을 노예처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언데드Undead인 좀비는 지성이나 감각이 없는 존재이다. 할리우드 영화 때문에 우리는 좀비를 추악한 괴물로 알고 있다. 영화에서는 드라큘라 이미지가 더해져 좀비에 물린 사람은 좀비가 된다. 

     

미국의 비참한 현실을 다루기로 유명한 조이스 캐롤 오츠의 <좀비>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노예를 갖고 싶은 서른 한 살 백인 남성의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부터 강박증에 시달려온 쿠엔틴은 전두엽 절제술을 통해 자신의 노예를 만들기고 결심한다. 할머니 건물의 관리인으로 살면서 그는 ‘건포도 눈’ 등에게 좀비 실험을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그들의 시체를 적당히 유기한다. 어린 흑인 소년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죄로 보호관찰을 받고 있지만 그의 살인은 매우 주도면밀하여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무고한 사람을 납치하여 폭력을 가하거나 터무니없는 실험을 하고 결국 살인을 저지르는 쿠에틴의 행위는 공포를 넘어 혐오감을 불러 일으킨다. 1인칭 서술자가 살인자 쿠엔틴 본인이어서 공포감은 한층 더해진다. 그는 잔인하고 끔찍한 행위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차분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독자라면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의 심리를 따라가는 일이 그리 유쾌할 리 없다. 물론 작가는 이를 통해 악의 본질, 인간성의 어두운 측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는 한다. 그게 이 소설의 주제일 것이다.      


그럼 연쇄 살인범인 쿠엔틴이 좀비를 두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에 자주 나오듯 좀비는 아무 반대도 없이 자신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이다. 그런 좀비를 가지고 싶어하는 쿠엔틴은 늘 주눅이 들어 살아왔다. 그는 철학과 물리학 박사이자 유명한 대학교수인 아버지, 의사인 어머니, 교감 선생님인 누나를 두고 있다. 할머니 역시 교양을 갖춘 백인 부자 노인이다. 반면에 쿠엔틴은 다른 사람의 눈을 제대로 맞출지 모르는 살찌고 머리숱 적은 문제아이다. 짐작하건대 그는 한 번도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조건 없이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다.      


연쇄 살인범은 유전적으로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하는 유전자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그것이 유전자 문제이든 아니든 쿠엔틴은 상대방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다. 좀비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굳어지자 그의 이성은 모두 그 계획을 실현하는 데 집중된다. 자신을 따르지 않아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대상을 책망하기까지 한다. 살인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하여 “아, 하나님. 당신이 존재한다면 지금 날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할 정도이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에서 진정한 좀비는 주인공 쿠엔틴이다. 그는 철저히 자기 욕망의 노예일 뿐이다.      


노예를 갖고 싶은 쿠엔틴의 욕망은 동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으로 나타난다. 일방적이고 지배적인 성행위를 통해 그는 쾌감을 느낀다. 그가 원하는 좀비는 그런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이다. 작가가 그의 취미를 포르노 보기로 설정한 것도 그것이 왜곡된 욕망과 폭력성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포르노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를 통해 폭력의 일상화를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물리력의 발휘를 폭력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좀비>는 지배욕과 폭력 일반에 대한 소설이다. 우리 모두의 무의식에 잠재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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