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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의자 Jun 24. 2020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

황지우

젊은 시절 내내 우리 옆에는 황지우가 있었다.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와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시’ 자체였다. 그는 세상을 감각하는 탁월한 촉각과 감성을 자극하는 민감한 언어로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보는 시각을 열어주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었고 그 안에서 개인이 어떻게 분노하고 절망하는지 들려주었다.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도식적이지 않았고, 긴장감 넘치는 표현에도 리듬이 담겨 있었다.      


그의 시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 가지 답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감각하지 못하는 현실이나 현상을 탁월하게 간취해내 그것을 남들과 다르지만 이해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 쉽게 접할 수 있는 경험 같지만 보통 사람들이 차마 표현하지 못한 것을 구체적이지만 보편적은 느낌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 그를 통해 정신적 각성과 감각적 희열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 시이다. 황지우의 시는 이런 탁월한 감각으로 우리의 젊은 시대를 노래했다. 위 두 시집의 표제작을 비롯해 “심인”, “동사”, “활엽수림에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면서 재미있는 언어 놀이였다.      


90년대가 끝나갈 무렵 발행된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에서 그의 언어는 조금 더 일상 쪽을 향해 있었다. 사십 대의 가장으로서 자기를 돌아보는 시들, 이웃과 주변의 소소한 일상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시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80년대 그의 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 시집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 한편 한편의 의미를 따지기 전에, 황지우가 마땅히 있어야할 자리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황지우는 우리에게 뭔가 기발하고 통쾌한 노래를 불러줘야 한다는.      


거의 십오 년 만에 다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않아있을 거다>를 읽었다. 그가 이 시집을 내던 나이와 지금의 내 나이가 비슷하다. 무엇보다 이 시집은 나의 현재로 읽힌다. 시인처럼 예민하게 일상을 감각하며 살지는 못하지만 그가 눈길을 주었던 주변과 중년에 대한 조소와 연민이 그냥 남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집의 시들은 소파에 반 누워 있는 늘어진 육체, 커버린 딸을 마음대로 안을 수 없는 현실, 늙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 우리는 이 시집에서 혼자 흐린 주점에 앉아 있게 될 자신의 미래를 인정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견딜지를 걱정하는 중년의 시인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젊은 시절 황지우가 좋다. 내가 꽃처럼 살았던 한 시절이 생각나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새로 읽은 이 시집의 황지우도 좋았다. 세상을 보는 조금은 늘어진 시선, 느린 발걸음을 발견하는 게 즐거웠다. 게다가 그의 언어 감각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표제작과 함께 “아직은 바깥이 있다”, “재앙스런 사랑”, “거룩한 식사”, “뼈아픈 후회”, “11월의 나무”를 좋게 읽었다. 아직 안 읽었던 분들, 오래 전에 읽었던 분들, 다시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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