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by 알로라 와인

2008년, 나는 처음으로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셨다. 그 해 여름, 아마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8월, 나는 이제 겨우 이사한 동네를 돌아다니며 높은 건물들과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익히고 있었다. 계속되는 건물 공사, 사람들의 말소리와 도로에서 시작되는 소음들 사이에서 뉴욕의 노란 택시는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중 찾은 작은 공원에서 열린 음악회에 나는 한자리를 찾아 들어가서 앉았다.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비는 머리 위를 덮고 있던 신문을 적실 정도로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였고, 공연을 하던 오페라 가수들도 긴 드레스를 들어 올리고 배경 뒤편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일어나 그 옆 야외 바로 자리를 옮겼다. 촌스럽게도 내가 주문한 메뉴는 잔 가장자리에 소금이 얹힌 옅은 노란색의 마가리타였다. 뉴욕이랑 맞지 않는 이 칵테일처럼 나도 두리번거리며 상기된 눈동자로 도시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내 옆자리로 다가왔고 그렇게 그를 처음 만났다. 그때 그가 무엇을 주문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날 밤늦게까지 공원에 있다가 공원 경비에게 경고를 받고서야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탄 기억만 있다.

그렇게 만난 그는 여름 내내 맥주만 마시더니 겨울이 되자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위스키를 마실 때는 꼭 싱글몰트를 마시도록 해, 블렌디드 위스키는 그 맛이 안나. 그리고 얼음 말고, 물이랑 같이 섞어가며 마시는 거야. 그래야 이렇게 향이 나. 향을 맡으면서 마시는 거야.”


어둑한 바 안의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그가 나에게 말했다. 그가 나에게 건 낸 위스키가 나의 첫 위스키였다. 향기로운 꽃 향기가 났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의 눈빛 때문인지 어둑한 조명 탓인지, 내가 처음 맛본 위스키는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향기로웠다.

‘글렌피딕’ 그 날 위스키 병에 박힌 라벨을 그는 그렇게 읽었다. 그 사람과 나는 항상 글렌피딕을 마시고 물을 주문하여 섞어 마셨다. 뉴욕타임스 드링크 섹션에서는 블랙 러시안이 다시 인기라고 떠들어댈 때에도 그와 나는 항상 위스키였다. 함께했던 마지막 밤도 마지막은 위스키였다. 곧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한 지 10년이 되어 가지만, 다시 그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글렌피딕 싱글몰트 위스키를 가장 좋아한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나는 말도 안 되는 헤어짐의 이유에 분노하였고, 모든 것을 다 잃은 기분이었다. 나의 인생에 이런 사람은 다시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내가 그에게 한 행동 하나하나를 후회하며 뱉었던 말들을 목구멍을 열어 다시 넣고 싶었다. 사랑이 호르몬 작용이라고는 하나 물리적으로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육 개월 남짓 보냈다.

나는 집 밖을 나가지 않고 밤마다 벽에 머리를 박으며 지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낮에는 밤이 될 때까지 드라마를 보고, 밤에는 잠을 자기 위해 아빠의 찬장에 있는 위스키를 책장에 숨겨두고 마셨다. 위스키를 한 모금씩 마시며 그놈의 집으로 달려가 뺨을 때리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한잔 두 잔 따라 마시는 위스키만이 상처받은 나의 마음과 조여 오는 심장을 이완시켜줄 수 있었다.





“지애야, 뭐 마실래?”

“나 싱글몰트 위스키, 얼음 말고 물 한잔만 같이 주문해줘.”

나란히 앉은 바 테이블 화려한 칵테일들 옆에, 미안하게도 우직한 위스키가 놓인 것을 보며 친구들은 아저씨 취향이라고 하면서 신기해했다. 하지만 나에게 칵테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고, 위스키는 향기이자 시간이었다. 의미 없이 뱉어내는 수다스러움 사이에서 아주 조용히 위스키를 마시면 따분한 결혼 생활 얘기도, 시끄러운 친구들도, 재미없는 회사 얘기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잠시 쉬었다가 술잔에 물을 붓는다. 그리고는 술잔을 크게 한 번 돌려준다. 물이 위스키 속에서 천천히 회전한다. 맑은 물과 고운 호박 빛깔의 액체가 비중의 차이로 인해 잠시 동안 뱅그르르 소용돌이치다가 이윽고 서로 녹아든다. 이 순간은 또 이 순간 나름대로 근사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는 순간, 저절로 웃음이 올라온다. 크리스털 잔에 위스키를 따르고 물 잔을 들어 올리는 손가락, 술잔을 한번 크게 돌릴 때 부드러운 스냅을 주는 손목, 호박 빛깔의 액체를 바라보는 눈빛. 하나의 순간이 떠오른다. 하나의 순간이지만 긴 시간이 책장을 덮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처음 위스키를 건네었던 그가 생각난다기보다는 그 모든 과정들이, 공기들이, 향기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퇴근하고 집에 가자마자 셔츠를 입은 채로 부엌 깊숙한 곳에 모아둔 아빠의 위스키들을 꺼내본다. 흘려 쓴 영문 필기체가 장식된 두꺼운 상자 안에 위스키 병이 들어 있었다. 얼른 한 병을 꺼내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아몬드와 쿠키를 꺼내는 사이, 아빠와 눈이 마주친다.


“이거 뭐야? 내 것 아니야?”

“어, 아빠가 안 마시는 것 같길래, 내가 마시고 싶어서.”

“이거? 이거 위스킨데?”

“응, 알아.”

“너 이런 술 마실 줄 알아? 그럼 얼음 꺼내 줄게, 같이 마셔”

“아, 아니야, 난 얼음 말고 물이랑 섞어서 마실게.”

“허허…… 얘좀 봐라…… 뭘 좀 아네.”


아빠는 가장 좋은 위스키는 중요할 때 먹는다며 부엌을 정리했다. 쉽게 오지 않을 그 중요한 순간을 생각하는 아빠를 보며, 이미 오래전부터 뭘 좀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는 나는 조용히 위스키 잔에 물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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