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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곤쌤 Sep 23. 2022

눈에 보여야 귀가 열린다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글쓰기에 관한 책을 보면 공통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추상적으로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하라"

하지만 ‘구체적’이라는 단어는 추상적입니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눈에 보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눈이 오는 연말이 되면 시상식을 합니다. 진심을 담아서 “스탭님들, 감독님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전하지만 기억에 남지 않을 때가 많죠. 17년이 지난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가 되는 수상 소감이 있습니다. 2005년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의 <너는 내 운명> 황정민 씨의 밥상 소감입니다.

"60여 명정도 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이렇게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그러면 저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근데 스포트라이트는 저한테 다 받아요. 그게 너무 죄송스러워요. 제가 한 것은 이 여자 보면(트로피의 여신상) 아마 발가락 몇 개만 떼어가면 제 거 같아요. 스태프들한테 감독님한테 너무너무 감사드리고요…”



눈에 보이는 표현을 살펴볼까요?

'스태프들이 세팅해두면 저는 연기만 하면 된다'가 아니라 "밥상을 차리면 맛있게 먹기만 한다"라는 표현이나 '제가 한 것은 조금밖에 없다'가 아니라 "이 여자의 발가락 몇 개"라며 트로피를 보이면 청중의 머릿속에 각인이 됩니다. 돌판에 새기듯 지워지지 않게 되죠.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단독 무기항 요트 세계일주'를 하신 김승진 선장은 한 강연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통상적으로 항해했던 평균 속도는 시속 10km 정도입니다. 주차장 내에서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밖에 안 돼요"

시속 10km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주차장에서 달리는 자동차 속도는 눈에 보이죠. 이렇게 '수치'를 눈에 보이게 바꿔보는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방이 엄청 크더라. 방 하나가 10평?”이라고 하면 감이 안 잡히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어떻게 바꿔볼까요? “방에 SUV 3대 정도 들어가겠더라"라거나 “방 하나가 오피스텔 원룸만 해"는 느껴지실 겁니다.



두 번째는 '감정이나 느낌'을 바꿔보는 겁니다. 주말 동안 3개의 재밌는 영화를 보고 친구에게 감상평은 1개로 전달됩니다.

"야 그 영화 진짜 재밌어!!"

각각 다른 재미를 느꼈지만 '엄청' '대박' '짱'과 같은 부사로만 재미의 정도를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도 웃었더니 윗몸일으키기 300번 한 것처럼 아파" 혹은 "보고 나니까 눈이 충혈됐더라. 몰입해서 보느라 눈도 못 감았거든"과 같이 눈에 보이게 말해보는 겁니다. 전달을 잘하는 사람들은 직접적인 감정이 아닌 눈에 보이는 상황으로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합니다.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을 보면 "라라 랜드를 보면서 내적 댄스를 췄어"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어" "킹덤을 보다가 지려버렸어"와 같은 말로 감정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언어 속에 수많은 눈에 보이는 표현이 존재하는 것이죠.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면 "완전 추워!!"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세 번째는 '스토리'를 눈에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유재석 씨가 한 토크쇼에서 꺼낸 에피소드입니다.

"제가 수영장에 갔었습니다. 수영을 하고 간이 화장실에 두루마리 휴지를 가지고 갔어요. 휴지를 돌려서 뜯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번 돌렸을 뿐인데 물이 묻어있으니까 뚝 끊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휴지가 변기에 빠졌어요. 그래 가지고 손에 한 마디가 남은 거예요. 그래서 담배를 물고 한참을 고민했어요. 이거 어떻게 해야 되나 도대체. 불러봐야 들리지도 않고, 옆에는 막혀있으니까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너무 고민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한 시간을 있으니까 다리가 저려오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어떻게든 나가야 될 것 같은데 그냥 수영복을 입으면 안 되잖아요. 생각을 하다가... 이 한 장 남은 것을... 붙였어요."



이렇게 눈에 보이게 말하면 청자는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듣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추상적인 말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붓만 들고 방황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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