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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써린 Dec 14. 2022

청소와 수능은 상관이 없겠지만,

사소한 칭찬 그 가치에 대하여

사실, 우리 집에 이런저런 나쁜 일들이 있었어.

하고, 꼭 하지 않아도 되는 고백을 절친에게 했을 때 그 사실의 무게가 버거웠을 중학생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야, 근데 너 우는 거 예뻐.


어이가 없어서 웃었고, 위로하는 친구도 웃었다.


우는 모습이 예뻤을 리가 없다. 사춘기 시니컬을 맥스로 장착하여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은 전혀 믿지 않을 나이지만 그래도 한 편으론 혹시 우는 모습이 괜찮은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마 담담하게 말하다 눈물을 주룩 흘리는 정도였기에 울고불고하는 장면보다는 보기 나쁘지 않아서 웃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이후로 근 30년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눈물이 날 땐 가끔 그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단순히 우는 것도 곱게 운다, 같은 얘기였음에도 늘 내가 언젠가는 예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부모님은 칭찬에 인색한 편이다. 사랑으로 키웠지만, 오글거리는 말은 자식에게도 하지 못하는 그런 부모랄까. 그리고 노력이나 성과에 대하여 ‘당연함. 내 자식임.’ 같은 태도였기에 추켜세우는 말이나, 춤추게 할 칭찬은 잘하지 않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건 손주들은 너무 예뻐 도리도리 잼잼만 해도 잘한다 잘한다 해준다는 조부모가 되어서도 ‘그렇구나’ 하는 태도를 보이는 부모님을 보면서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냥 칭찬에 인색한 사람들이다. 딱히 원망은 하지 않는다. 자식 기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고 그냥 태생이 그러하신 분들이라 받아들였다.


다만 집에서 칭찬을 많이 못 받아서 다른 곳의 칭찬이 더 깊게 기억에 남는 것이었을까 싶다.


고1 때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청소를 잘한다고 칭찬해주신 적이 있다. 아마 이전에도 학교에서 발표를 잘하거나, 숙제를 잘했을 때, 이런저런 것들을 잘했을 때에도 나는 칭찬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꾸중도 들었고, 이 또한 기억에서 많이 지웠다.) 하지만 다른 칭찬들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학기초 교실 청소시간에 열심히 쓸고 닦는 나를 보며 담임 선생님이 “아무개는 청소를 참 요령 있게 한다. 이런 친구들이 수능을 잘 봐!”라고 했다. 나름 골똘히 생각하며 이리저리 먼지를 모으던 중이었다. 그래서 나의 찰나의 고심을 알아본 선생님의 칭찬이 와닿았던 듯하다. 워낙 발성이 좋았던 선생님이라 청소하던 친구들이 다 까르르하고 웃어넘긴 유머의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이 재밌고 좋았다.


선생님에게 청소와 수능이 관련이 있는 것의 근거는 듣지 못했다. 그러니 그냥 우스갯소리였을 것이다. 내가 수능 만점자와 같이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내신 석차가 수능 모의고사를 앞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학생이었다. 수능을 준비하는 내내 이 얘기가 기억에 남았다. 누구나 겪는 수험생 슬럼프가 왔을 때에도 수능을 잘 볼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내심 생각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스무 살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과 함께 제목의 문구가 한창 유행했다. 아주 사소한, 누군가에게는 이게 칭찬이긴 한가 싶은, 그런 말도 나의 인생을 내내 따라다녔다. 과연 칭찬이란 것은 고래도 춤출만한 일이 맞았다.



위의 일들을 포함하여 몇몇 사소한 말들을 듣고 그 이후 진심을 다해 사소한 칭찬을 한다. 과장하거나 만들어서 하는 입에 발린 말은 못 하는 성격인데, 대신 사소하더라도 좋은 점은 속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늘 직접 말했다. 듣는 이가 기억을 못 할 수도 있고, 딱히 칭찬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비용이 드는 건 아니니까.


친구의 깔끔하게 정리된 프린트물 파일을 보면서 너무 잘한다고 칭찬을 말한다거나, 어쩌면 너는 언제나 옷에 구김이 하나도 없냐고 센스쟁이라고 말한다거나, 눈이 초롱초롱해서 부럽다고 한다거나, 이런 사소한 얘기들을 자주 하게 되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내가 받은 칭찬을 기분좋게 되돌려주자는 의미에서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기르다 보니, 나 또한 태생적으론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의식적으로 남을 칭찬하던 사회생활하던 사람은 어디로 가고 부모님과 같은 양육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부모에게 닮지 않으려 노력했던 부분을 결국 그대로 닮는 것도 신기하다. 유전자는 칭찬을 하지 않는 쪽으로 새겨졌겠지만, 아이들에게도 남에게처럼 노력 중이다. 하루에 최소 한 번은 의식적인 칭찬은 속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말 하려고 한다.


첫째 아이가 아침 식사를 하며 학교에 입고 갈 옷에 딸기잼을 묻혀 아빠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혼자 낑낑대며 딸기잼을 지우고 왔는데, 살짝 묻은 부분만 닦는 법을 알지 못해 옷이 다 젖어 꼴이 우스웠지만, 엄마에게 닦아달라 하지 않고 스스로 닦은 것을 칭찬해주었다. (사실 다른 집에선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칭찬할 일인지 쓰면서도 의문스럽다.)


둘째 아이는 저녁에 뜬금없이 설거지나 세탁기를 돌리는 집안일을 해보고 싶다고 제안을 했는데, 저녁 늦은 시간이라 실제론 성사되지 못했지만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서 칭찬했다.(집안일 잘하는 아들로 키우는 것이 목표라 한 걸음 나아갔다는 엄마만의 말 못 할 성취감도 들었다.)


이 정도도 칭찬 축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잔소리와 고함지르기를 백만 여덟 번 한 이후 칭찬하는 내 모습이 이상해서라든지, 칭찬할 거리를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어서가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슬프게도 뭐 그렇기도 하다.


그래도 내 삶을 돌아보며 칭찬만큼 쉽게 누군가를 즐겁게 하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글거려서, 닭살이 돋아서, 칭찬을 잘 못하는 사람들도 되돌아보면 본인이 들은 칭찬에 행복했던 시간이 있을 것이다. 오글거림을 이겨내고, 사소한 칭찬을 내뱉어 버리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언제라도 자신은 당연히 여기는 것을, 누군가는 멋진 점 부러운 점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photo by pixabay, istock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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