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같은 딸

책_「카메라와 워커」

by 전소유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12:40분. 학생들의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나는 늦어도 5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환기를 하고 에어컨과 공기청정기 및 컴퓨터를 켜서 도서관을 깨운 뒤 입구 문을 활짝 열어두고 급식 후 찾아올 학생들을 기다린다. 그런데 가끔 종이 치자마자 도서관으로 오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 아이를 보면 어째서 사서가 아니라 엄마의 마음이 되는지. 기어코 급식은 왜 먹지 않았냐는 예의 바른 간섭을 하고야 만다. 오늘 학교 급식이 맛이 없어서요,라고 멋쩍게 웃는 아이 얼굴에서 또래의 내 딸아이를 떠올린다.


올해 딸아이가 고등학교 들어가고 보니 요즘 학생들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이 확 와닿는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90년대 초반에도 이른 아침 등교하고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학원을 다니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공부의 비중은 공교육이 더 컸던 것 같은데. 요즘은 학원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공교육을 따라갈 수 없다 하고 또 시험만 치는 게 아니라 수행이니, 세특이니, 챙기고 신경 써야 할 것도 태산이다. 나의 그때는 이미 지나간 시절이라 고생은 잊고 낭만만 남아선지, 아니면 엄마로서 딸의 수고를 지켜봐야 해선지 더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도서관에서 만나는 학생들이 꼭 딸 같다. 쉬는 자투리 시간에 잠시 들러 공부하고 가는 학생을 보면 기특하면서도 안쓰럽고, 조그만 담요를 끌어안와선 잠시 눈을 붙이는 아이들을 보면 많이 피곤한가 걱정이 앞선다. 도서관을 오고 가며 밝게 인사하는 학생들의 얼굴에 나도 덩달아 기운이 솟아나고, 간혹 서가 앞 의자에 앉아 책 속에 푹 빠져 있는 학생을 발견하면 그 모습이 몹시도 이뻐 보이고 그렇다.


이처럼 딸 같은 학생들에게 도서관 사서로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등학생이다 보니 단순한 독서 활동보다는 수행이나 세특 또는 진로와 관련된 책을 큐레이터 해주고 싶다. 신간으로 들어온 <교과세특 관련 추천 도서 목록>을 참고해 그중에서 도서관에 소장된 도서를 하나씩 선별해 간단히 소개글을 붙여 전시한다. 또 2022년 개정된 공통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문학의 목록을 찾는다. 현대 및 고전 시가도 있고 수필이나 극문학 글도 있지만 그중에 현대 및 고전 소설을 한데 모아 눈에 잘 띄는 서가에 배가해 둔다.


박완서 <카메라와 워커>


목록 중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판형의 책으로 삽화가 들어간 박완서 작가의 단편 <카메라와 워커> 다. 박완서 작가는 한때 자주 찾아 읽던 작가이다. 소설임에도 그분이 직접 겪은 전쟁과 아픈 가족사와 관련된 경험이 녹아들어 있어 소설이라는 점을 알고 읽다가도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늘 헷갈리곤 한다. 이 단편 <카메라와 워커>도 그렇게 아리송하다. 소설의 첫 문장은 '나에게는 조카가 하나 있다.'로 시작된다.


전쟁으로 오빠와 올케가 두 죽고 젖먹이 갓난쟁이 조카를 남겼다. 화자의 어머니이자 조카의 할머니는 먹을 게 없자 혹시나 젖이 돌까 싶어 삐쩍 곯은 가슴을 손주에게 들이민다. 처녀였던 화자는 배고파 빽빽 우는 조카를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안타까움에 자신의 젖이 도는 듯한 명징한 느낌과 조카에게 젖을 먹이고 싶었던 기억이 강렬히 남아있다. 그 때문에 결혼 후에도 자기 자식보다 조카를 더 사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조카의 인생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한다. 그 집착이 오로지 사랑이 아님을 알아가면서 그 마음의 근저가 어디일까 더듬어 간다. 인생에서 스스로를 강렬히 흔드는 경험의 기억은 이렇게 엄청나다.


59쪽
그러고 보니 나는 내 자식을 조카인 훈이보다 덜 사랑해 키웠는지는 몰라도, 그게 더 잘 키운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조카는 부모를 잃고 작자는 오빠를 잃었다. 삶이 송두리째 뽑혀 던져지는 그런 깊은 고통의 기억은, 조카가 오빠처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단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주말이면 가족들과 카메라를 들고 소풍을 갈 수 있는 가장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조카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 작은 소망이 점점 어긋날수록 사랑은 점점 집착이 된다. 작자가 조카에게 쏟은 과한 사랑 혹은 집착의 근원이 무엇이든간에, 그로 인해 자연히 방치(?)된 자신의 자식들이 오히려 더 잘 자란 것 같다는 작자의 뒤늦은 깨달음이 인상적이다.


적당한 사랑은 어렵다. 애당초 적당이라는 단어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기나 할까. 학교 도서관에서 만나는 딸 또래의 아이들을 대하듯 내 딸을 적당히 사랑할 수 있다면. 점심 급식이 입에 맞지 않아 굶었다는 딸의 말에, 곧 아파 쓰러지기라도 할 듯 조바심을 내며 밥밥, 거리지 않는다면. 잠이 부족해 기절하듯 잠든 아이에게 그러게 일찍 좀 자라고 잔소리하기보다 걱정 어린 눈길이 앞선다면. 다른 학생에게 하듯 내 딸에게도 밝게 웃으면 인사를 건넨다면. 사랑이 적당을 넘어서서, 아무개 학생에게는 쉬운 일이 딸에게는 쉽지 않다. '딸 같은 학생'과 '진짜 딸'은 같지 않았다. '딸 같은 며느리'와 '진짜 딸'이 전혀 다르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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