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의 시작

서고_(상상 속) 깊은 바다

by 전소유

모 여고에서 초단시간 계약직 사서 일을 시작했다. 1년간 모 대학 사서교육원에서 수업을 듣고 최근 '준사서 자격증'을 취득했으니 그런대로 운 좋게 빨리 일을 시작한 셈이다. 책을 좋아하고 도서관을 좋아해서 뒤늦게 사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현실의 사서 일은 취향과는 별개라는 팩트를 익히 들어왔다. 몇 년 전 모 초등학교에서 사서 보조로 일을 한 적이 있어 영 모르는 바도 아니다. 그럼에도 초단시간 근무이니 주에 14시간만 나가면 되고, 또 내신과 수행 준비로 도서관에 갈 틈도 없이 바쁠 고등학교 도서관이라 이용자가 적고 한산해서 아직은 사서라는 직업의 이상과 현실이 적절히 혼재되어 있다.


도서관은 생각보다 꽤 넓었고 리모델링 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깔끔하다. 여유롭게 놓인 서가에 책들이 잘 분류되어 있고, 서가 사이사이 학생들이 책을 읽거나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잘 갖춰져 있다. 옅은 나무 색 서가가 양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나 공간이 넓고 층고가 높아서 전반적으로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도서관 개방 시간이 짧은데도 점심시간 이후 도서관을 찾은 학생들이 꾸준히 있고 수업이 비는 선생님과 직원분도 가끔 찾는다. 반년 넘게 사서 없이 방치되었다는 도서관 치고는 꽤 관리가 잘 되어 있다.


도서관 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대출 및 반납을 하는 선반이 있고 그 뒤로 사서가 업무를 보는 책상이 있다. 교실 세 개를 붙여 리모델링했다는 기다란 형태의 도서관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방향에 책상이 놓여 있다. 책상 뒤편으로 5층짜리 서가와 비도서자료장, 서랍장, 연속간행물 서가 등이 있고 제일 왼쪽에 서고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서고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 몇 년 전 일했던 초등학교는 서고-라기보다는 그냥 이것저것 넣어두는 창고의 개념-가 이층에 있어서 도서관이 위치한 일층에서 책을 옮기려면 카트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이동해야 해 꽤 번거로웠던 기억이 난다.


서고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특유의 묵은 냄새가 콧구멍 속으로 훅 달려든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아니라 오래된 책의 냄새다. 책의 근원도 종이이나 책이 되기까지의 기나긴 과정과 책이 되고부터의 역사, 거쳐간 사람들의 손때, 겹겹의 기억 등이 한데 발효되어 종이와는 또 다른 특유의 냄새를 갖는다. 냄새 다음은 촉각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의 도서관에는 에어컨의 경쾌한 냉기가 넘실대는데, 서고는 낡은 책들의 꺼져가는 생명을 견뎌내듯 진하고 묵직한 공기로 꽉 차 있다. 온몸을 감싸는 듯한 그 묵직한 공기의 감각 혹은 저항은 마치 무협지 속 어느 고수가 쳐놓은 결계를 통과해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게 한다.


실제로 서고는 전혀 다른 세계 같다. 서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 특유의 냄새와 묵직한 공기 속에서 일순 숨이 막힐 듯하다. 그러나 이내 서고가 발산하는 어떤 고고한 기운 속에 휩싸여 나는 평온해진다. 바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서 둥둥 떠 다니는 기분이랄까. 거짓말, 이건 거짓말이다. 내가 깊은 바닷속에서 그리 평온할 리는 없다. 진작 물밖으로 튀어나가 눈물콧물 쏟으며 '켈록 켈록, 나 죽겠다' 소리가 터지고도 남는다. 아니, 애초에 바닷속에 뛰어들 생각조차 할 리가 없다. 내가 상상한 모습은 어릴 적 봤던 tv만화 '미래소년 코난'에서 코난이 물고기를 잡으러 긴 창을 들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두 눈을 부릅뜨고 유영하는 장면이다. 나는 상상 속의 코난이 되어 서고라는 바닷속 같은 세계를 둥실둥실 떠다닌다. 코난의 긴 창 대신 검은색 3M 작업용 장갑을 끼고, 때론 3층짜리 카트를 달달달 끌며.


어쨌든 특별한 공간인 이곳 서고는 내가 여기서 일하게 된 목적과도 연관이 깊다. 매년 해오던 폐기도서 작업이 2024년 분부터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무엇보다 사서가 필요하던 차에, 면접에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도서 폐기 업무 맡겨만 주십시오!' 장담했던 내가 합격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다행히 폐기할 도서들은 이미 거의 선별되어 서고로 옮겨져 있었고 나는 이 책들을 하나하나 제적 도서로 등록하고 엑셀 파일로 만들어내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해야 할 주요 업무는, 어느 날인가 예고도 없이 서고로 끌려갔을 책들을 하나씩 끄집어낸 후 확인사살하듯 바코드를 찍음으로써 그들에게 '폐기도서'라는 주홍글씨를 새기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은 몰랐다. 서고라는 바닷속에서 코난처럼 두 눈 부릅뜨고 떠다니다 건져낸 숨은 보물들이 얼마나 많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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