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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 The Rests Oct 22. 2023

품격을 지키는 삶, 자연스럽고도 단순하게

아시시 순례 에세이: ⑨ 양심에 가해지는 폭력으로부터의 저항

순례 10일 차,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어떻게 아시시가 영적 지도자들의 진두지휘 아래 시민들이 합심하여 시차원에서 나치에 항거하며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도왔는지 그 역사적 기록들이 보관된 박물관을 방문하고 관련한 다큐멘터리 필름을 시청했다. 나는 그날 몇 년 전 한 선생님의 추천에 의해 시청했던 ‘정신의 무장(Weapons of the Spirit)’이라는 1987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필름(상영시간 1h 30m)이 떠올랐다.


이 필름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나치에 협력하고 있던 프랑스 정부를 무시하고 박해받던 유대인들의 피난처가 되어준 프랑스 중남부 산속의 작은 개신교 농촌 마을 ‘르 쟝봉 쉬르 리그뇽(Le Chambon-sur-Lignon)’에 대한 놀라운 기록이다. 이 마을에는 주로 프랑스 가톨릭 최초의 개신교인 위그노(박해를 받은 독실한 개신교인들)가 거주했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당시 그들의 목사였던 앙드레 트로메(AndréTrocmé)의 권고, "기독교인의 책임은 정신의 무장을 통해 양심에 가해질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다(The responsibility of Christians is to resist the violence that will be brought to bear on their consciences through the weapons of the spirit)"를 따라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위해 그들의 집과 농장을 열어 주어 약 5,000명 이상의 유대인들의 생명을 살려냈다.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감독 자신이 1944년 3월 25일 이 마을에서 숨어 지냈던 유대인 부부에게서 태어난 ‘피에르 소바주(Pierre Sauvage)’이다. 그는 포악한 나치와 그들의 협력자에 의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단 한 사람의 배신자 없이 마을 공동체 전체가 짧은 시간도 아닌 수년간 수천 명의 유대인을 그토록 "자연스럽고도 단순하게" 구할 수 있었는지를 알고 싶어 이 다큐멘터리영상을 제작했다고 고백했다. 피에르 소바쥬 감독은 자신이 태어난 르 쟝봉을 찾아 생존해 있는 당시 마을 사람들을 통해 몇 가지 이유를 찾아낸다. 이 필름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감독과 에두아르 테즈(Edouard Thes) 목사와의 짧은 인터뷰 내용이다.  


     피레르 소바주 감독: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던 거죠?”

     에두아르 테즈 목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피에르 소바주 감독: “그게 전부 인가요?”   

     에두아르 테즈 목사: (침묵) “네.”   


르 쟝봉 마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17세기 이후 종교적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아온 위그노들로 정부 혹은 권위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마을에는 과거로부터 배운 교훈을 잊지 않고 이를 계속해서 상기해 주며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권면해 주는 헌신적인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다. 즉, 르 쟝봉 마을 사람들 모두는 그들 자신의 분명한 역사적 인식과 함께 항상 자신의 행동을 가치와 분리하기를 거부하는 소박하고 확고한 신념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행동하기보다는 행동하지 않고, 괴로움보다는 괴로움 없이 행동하는, 독립적이고 종교적인 오늘날 사람들에게 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단순한 진리를 르 쟝봉 마을 사람들은 말하고 있는가.


정신의 무장(Weapons of the Spirit) 이라는 1987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필름 (상영시간 1h 30m)


2018년 여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예멘 난민 사태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2009년,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의 개발원조 수혜국에서 드디어 국제사회 원조의 90% 이상을 담당하는 주요 공여국 모임 OECD내의 개발원조위원회의 회원국이 되어 공식적으로 ‘선진공여국’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예멘 난민 사태는 이 자랑스러운 타이틀을 참으로 무색하게 만든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들과 같았던 예멘 형제자매들을 대하는 우리 공동체의 미성숙한 민낯을 적나라하게 마주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당시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오늘의 지구촌 시대에 걸맞은 성숙한 세계시민의 품성과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며 갈 곳 없는 난민들을 보듬어 줄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했지만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난민 거부 청원은 약 70만 명의 국민의 지지를 얻었고 제주도와 서울 등지에서 열렸던 반난민 집회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당시 해외에 거주 중이었고 먼 길을 피난 왔던 예멘 분들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설사 내가 한국에 거주 중이었다 해도 내가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취했을지는 지금도 잘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 당시 제주도 개신교와 천주교 기독교 비율은 약 18%, 대한민국 전체로는 28% 정도로 집계되었다. 이 수치라면 기독교인들이 우리 사회의 다수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작은 수의 사람들도 아닌 것 같은데 뭔지 모를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다. 우리 안에서도 아시시나 르 쟝봉마을에서 있었던 그런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구속적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쓰이면 좋겠다는 생각, 또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도록 누군가에 의해 성실하게 기록되고 그래서 계속 우리 모두에게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들었다.  


[참고] 2015년 시작된 예멘 내전사태 이후 예멘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다른 나라로 탈출, 난민신청을 하는 일이 증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한 해 제주도를 통해 입국한 예멘 국적의 난민이 561명이었는데, 이중 549명이 난민 신청을 한 상태였다. 최종적으로 정부는 예멘난민 신청자 중 난민인정 2명, 인도적 체류허가 412명, 단순 불인정 56명, 직권종료(출국자) 14명으로 결정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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