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씩 걸치곤 누워서 부유하는 사람으로
점심에는 부산에 있는 친구와 20분간 통화를 하고, 다른 친구에겐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들은 하나 같이 부산에 언제 오냐고, 와서 같이 놀자고 말했다. 운 좋게 한강에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살아 자주 혼자서, 종종 친구와 한강을 걷는다. 서울 하면 손꼽히는 한강을 가까이하면서도 완전히 서울에 속하지 못한 채 산다. 한발 아니 다리 한쪽은 아직까지 부산에 슬쩍 얹어놓고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채로.
서울이 싫은 건 아니다. 서울은 처음으로 독립의 기쁨을 안겨준 곳이니까.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기질은 물론 웃음이 많지 않은 부산 집에 살면서 언젠가 혼자서 살 날을 꿈 꾸며 잠에 들었으니까. 열심히도, 엉망진창도 아닌 적당한 취업 준비를 하면서 얻은 합격 소식 하나. 26년째 쌓인 짐을 일주일 만에 추려서 서울로 올라오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채 흔들림이 거의 없는 기차 안에서 멀미 비슷한 걸 했으니까. 돌아오는 기차표를 매번 들고 타던 취준생의 기차와 가는 기차표만 있는 사회초년생의 기차는 공기가 달랐다. '정말 떠나왔네. 정말 드디어 혼자가 됐네.'
혼자의 기쁨은 기차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증발했고, 혼자의 현실은 서울 땅에 내려놓은 두 다리만큼 묵직했다. 출근할 직장은 있지만 몸을 누울 곳은 없는 아직은 등본 상 주소는 부산광역시인 나. 그날부터 열심히 몸을 뉘울 집을 알아봤지만 아주 작은 내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월세 집만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친구 집에서 며칠 얹혀살면서 회사에 출퇴근할 수 있었지만, 친구 집은 혼자도 살기 벅찬 원룸이었고 회사에선 1시간 30분 거리였다.
퇴근을 하고 매일 집을 보러 다니고, 주말도 꼬박 집을 보는데 썼다. 몇 주간 이런 날이 계속되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지금까지 본 집 중 그나마 살 수 있는 수준의 집을 골랐다. 1000만 원에 월세 45만 원. 다른 집보다 조금 큰 평수였지만 불을 켜지 않으면 빛 한 줄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반지하는 아니었지만 여름에는 자주 습했고, 옆집도 옆 옆집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이름도 성도 몰라도 누군가가 옆집에 살고 있다는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 알게 됐다. 집 앞에 놓인 누군가의 택배를 보는 일이, 일정한 시간에 들어왔다 나왔다 하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들을 듣는 일이 어느 정도 내 살아감에도 보탬이 되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사는 건물에는 건물만의 온기가 있는 듯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체온에서 각 0.5도씩을 떼어내 건물이 머금고 있는지도 몰랐다. 우리 집에 들어오면 여름에도 겨울 냄새가 났다. 한여름에 역에서 좀처럼 가깝지 않은 우리 집까지 걸어오다 얼굴이 모두 땀범벅이 돼도, 집에 돌아오면 발바닥은 빠르게 식었다. 우리 층에는 나만 살았고, 꼭대기층에는 종종 아이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5명 정도의 가족이 사는 것 같았다. 그 가족과 나를 합치면 총 6명. 6명의 체온에서 각 0.5도씩을 떼내면 총 4.5도의 건물에서 살았다.
부산 집은 창문을 열면 놀이터나 도로가 보였고, 저 멀리는 산이 보였다. 햇빛도 아주 충분했다. 서울 집들은 대부분 내 집 창문으로 남의 집 건물 벽을 하염없이 바라봐야 하는 곳이 많았다. 창문. 공기나 햇빛을 받을 수 있고,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벽이나 지붕에 낸 문. 창문의 사전 상 뜻은 이랬다. 하지만 햇빛 따위는 없는 게 당연했고, 내다볼 수 있는 곳이 남의 집 벽인 것이 서울의 창문이었다. 물론 내 집도 그랬다. 어릴 때 "벽 보고 서있어."는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받던 벌이었는데, 나는 커서 돈 50만 원 씩을 매달 꼬박 내면서 서있지는 않아도 되지만 벽을 보며 앉아있을 수 있는 집을 구했다.
집주인은 할아버지였는데, 어느 날은 새벽에 자고 있는 우리 집 문을 불쑥 열었다. 사람이 없는 다른 집의 동파를 막기 위해 보일러를 켜려고 들어왔다곤 하는데, 이유야 어찌 됐든 내 집 문이 벌컥 열리는 곳에 산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곤 또 몇 달 뒤, 친구가 놀러 온 그날도 집주인은 문을 벌컥 열었다. 다음날 연락을 하니 또 옆집을 열려다 잘못 열었단다.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못살겠다 하니 잠금장치를 달아주겠다더니, 동네 카센터 젊은 청년을 데려와선 자기끼리 이게 맞다느니 저게 맞다느니 남의 현관문을 열어 놓고 5분 이상을 입씨름을 해댔다. '나는 어쩌다 이런 위험한 집을 들어왔는지.. 해도 없고 내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 그냥 혼자 사는 것만 충족되는 그런 곳에 몇 밤을 더 자야 하는지' 답이 없는 질문을 하며 옆에서 오랜 시간 서있었다. 다행히 1년만 그 집에 살고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마지막까지 보증금 문제로 속을 썩인 집주인 할아버지 잘 계시나요? 어린 친구들한테 그렇게 나쁘게 굴지 마세요. 다 돌려받아요.)
두 번째 집은 채광이 좋았고, 층고도 높아서 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문제가 없었다. 이사도 하고 이직도 하면서 삶의 많은 부분들이 안정화되어 간다고 생각하니 서울이 조금 좋아지긴 했다. 걸어가면 한강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이 집이 더 좋아진 날도 기억난다. 나름 자주 가는 동네 카페도 생겼고, 가까운 편의점 몇 군데는 바싹하게 알고 새로운 밥집이나 카페가 생기면 반갑기도 하다. 등본상의 집이 이제 서울 특별 시니까 진짜 서울 사람이 된 걸까. 누군가가 나에게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물어보면 나는 "서울에서요"라고 해야 할까. "부산에서요"라고 해야 할까. 나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서울에 산지 3년 된 친구가 서울이 좋아 올라왔지만 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고생하면서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털어놨다. 매번 서울의 좋은 곳들을 정성스럽게 찾아다니던 친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몇 년 전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누워만 있어도 50만 원씩을 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자조적인 유머를 같이 나누기는 했지만 그 친구는 서울 생활에 100%쯤은 아니라도 92%쯤은 만족하고 사는 줄 알았다. 어딘가에서 올라온 우리들은 왜 서울에 완전히 속할 수 없는 걸까. 우리도 모르게 돌아가는 기차표가 마음에 하나씩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다. 서울 사람인지 부산사람인지 헷갈리는 건 부지기수고, 무엇을 위해 서울에 사는지 모른다. 뭘 대단히 이루려고 사는지도 모른다. 친구들이 장난처럼 부산에 내려오라는 말을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이루려고 여기에 왔는데. 부산에 가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그런데 이젠 왜 여기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얻는 건 있었나. 잃기만 한 건 아닌가.
집을 떠나 서울에 사는 내가 대단하다며 자기는 아무리 그곳에 인연이 있다고 해도 가족을 떠나서 살 용기가 없다고 말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가족은 어떤 일을 해도 결국 내 편인 사람들이니까. 그런 사람들을 놔두고 가기 무섭다고 말했던가. 생각해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다. 서울에 살고 있지만, 결국 부산에 버티고 있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서울에서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서울에 완전히 소속되지 못한 채 서울과 부산에 한 발씩 걸치곤 누워서 부유하는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