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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간지 Apr 09. 2022

 헤르만 헤세 『데미안』 '한 젊음의 이야기',

방탄소년단(BTS)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책.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5186




  주인공 싱클레어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성장소설. 수 많은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용기가 되어준 책. 그리고 BTS의 2집 앨범 『wings』의 모티프가 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어릴 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읽었는데, 시간이 흘러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걸 보니 지적으로 성숙했다는 점에서는 기쁜 일이긴 하나,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니,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데미안 중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다. 어릴 때는 이 말을 투쟁과 같은 노력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글이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이제 내게 아브람삭스는 더이상 피나는 노력을 통해 성취해야 할 무언가가  아닌, 나를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나를 둘러싼 수많은 관념들로부터의 탈피이다.


  이렇게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혹은 가치관의 변화에 의해 같은 문장이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문학이 주는 묘미이다.  한편으로는 작품을 읽는 동안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우리 삶에 문학이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p7


  주인공 싱클레어는 화목하고 평온한 가족에서 자란 평범한 신학교 학생이다.  싱클레어에게 가정은 아무런 시련과 고난이 없는 선의 세계에 해당한다. 그런 그의 삶에 어느날 자신을 괴롭히는 불량한 친구 크로머가 등장한다. 크로머는 집이라는 선의 세계와 대비되는 악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렇게 크로머로 인해 고통스러운 나날들의 연속이던 어느날 데미안이라는 친구가 나타나 싱클레어를 크로머로부터 구원해 준다.


  이후 그들은 여러 대화를 나누며 가깝게 지낸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사람들이 악인이라고 정의하는 카인이 실제로는 악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과 함께,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이야기들을 해 준다. 왠지 모르게 싱클레어는 그런 데미안이 불편했고, 의식적으로 그를 피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싱클레어가 다른 지역의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데미안과도 잠시 작별을 하게 된다.  데미안과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에도 여러 어려움들이 그의 삶에 닥치지만,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그리고 에바부인이 준 가르침들과 깨달음을 통해 시련들을 극복하며 내면적으로 성숙해 간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이라는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저 단순히 사춘기의 한 소년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라면, 이 소설이 이렇게까지 유명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소설 "데미안"을 통해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온갖 권위적인 것들이 정해놓은 진리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저항을 통해 자신만의 내면에 도달해야 한다' 이 두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데미안 p.9


  "새는 신에게로 나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람삭스." 여기서 '아브람삭스'는 선과 악, 흑과 백, 여성과 남성 등 양 극단의 양면적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는 신이다. 즉, 아브람삭스라는 하나로 정의 될 수 없는 존재를 통해 헤세는 세상의 모든 만물은 양성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역설한다.


그러나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죄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루어지는 거야. 세계의 이 다른 부분이 통째로, 이 절반이 통째로 숨겨지고 묵살되는 거야.

데미안 p.83


  우리는 흔히 '좋은 것이 아니면 나쁜 것'.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관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대상을 나누는 기준들 또한 대부분은 기성의 권위에 의해 정해진 것들이다.  헤세는 '아브람삭스'라는 신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이분법적인 시각이 아닌 포괄적인 이해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결국 '새가 아브람삭스에게 날아간다는 것'은 개개인이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세상이 흑과 백의 공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금지되었다>는 것은 그러니까 영원한 것이 아니야, 바뀔 수 있는 거야. … 그러니가 우리들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 사실 그것은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늘 그러게 마련이듯이 그런 사람은 살기가 쉬워. 다른 사람들은 운명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느끼지. 그들에게는 어느 명예 있는 남자건 날마다 하는 일들이 금지되어 있어.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폄하되는 다른 일들은 허용되어 있어. 그러니 누구나 자기 자신 편에 서야 해.

데미안 p.86


  결국 우리의 삶은 우리가 우리이지 못하게 하는 기존의 권위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을 통해 '아브람삭스'라는 진정한 '내면의 나'에 이르는 투쟁의 연속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삶의 무수히 많은 그 투쟁의 과정들 속에서 우리는 내면의 성숙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헤르만 헤세는 싱클레어라는 소년의 성장을 통해 보여준다.


  소설 속 피스토리우스라는 싱클레어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인물로, 아브람삭스에 대해 설명해 준다.


자네를 날게 만든 도약,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리 위대한 인류의 재산이지. 그것은 모든 힘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지. 그러나 그러면서도 곧 두려워져! 그것은 빌어먹게 위험하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렇듯 차라리 날기를 포기하고 법 규정에 다라 인도 위를 걷는 쪽을 택하지. 그런데 자네는 아니야. 자네는 계속 날고 있어. 유능한 젊은이에게 합당한 대로 말이야. 그리고 보게, 자네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네. 자네가 점차 그 주인이 되는 것을 말이야.」

데미안 p.144

 

 그러나 말해 두겠는데, 그것을, 그 꿈들을 그대로 살게, 그것을 유희하게, 그것에 제단을 세워주게! 그것은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길이야. 우리가, 자네와 나,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이, 세계를 한번 새롭게 개혁하게 될지 못하게 될지 그거야 두고 봐야지. 그러나 저 안쪽 우리들 마음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하네.

무서워하지 말게! 그것들은 자네가 지닌 최상의 것이야. 나를 믿어도 되네. 나는 꿈을 많이 일어버렸어. 자네 나이에 사랑의 꿈들을 능욕했지. 그래서는 안되는데. 압락사스를 알면,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돼. 아무것도 무서워해선 안 되고 영혼이 우리들 마음속에서 소망하는 그 무엇도 금지되었다고 해서는 안되지.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사물들이지. 우리가 우리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거지. 그들은 바깥에 있는 물상들로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언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행복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한 번 다른 것을 알면, 그때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겠다는 선택이란 없어져 버리지.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쉬워. 우리들의 길은 어렵고. 우리 함께 가보세.

데미안 p.150~152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을 통해 많은 배움과 깨달음을 얻지만 그는 결국 피스토리우스를 떠난다. 이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피스토리우스의 지식과 깨달음들은 피스토리우스의 것이지 싱클레어의 것이 아니다. 즉 그것들이 틀리지는 않다. 다만 피스토리우스의 삶에는 맞을 수도 있으나 싱클레어의 삶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결국 세상의 진리는 남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과 그 길은 홀로 걸어가야 하는 외롭고 고독한 여정임을 헤르만 헤세는 피스토리우스와 싱클레어의 만남과 작별을 통해 말하고 있다.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내 마음속에서는 느낌 하나가, 내 친구 피스토리우스를 그렇게 절대적으로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에 저항했다. 내 청년 시절 극히 중요한 몇 달 동안 내가 체험했던 것은 그와의 우정이었고 그의 충고, 그의 위로, 그의 친근함이었다. 그를 통해 신이 나에게 말했다. 그의 입으로부터 내 꿈들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밝혀지고 해석되어서. 그는 나에게 나 자신에게로 가는 용기를 선사했다. 아, 그런데 이제 서서히 자라가면서 나는 그에 대한 저항을 감지한 것이다. 이제 들으니 그의 말에는 지나치게 많은 가르침이 담겼고, 그가 완전히 이해하는 건 나의 한 부분뿐이라고 느껴졌다.

데미안 p.166


피스토리우스는, 그가 나에게 준 것을 그 자신에게는 줄 수 없었으며 내 눈에 비쳤던 그의 모습도 그의 실체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는 길잡이인 자신도 넘어서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길로 나를 인도했던 것이다.
데미안 p.169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그 생각이 내 마음을 깊이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이 체험에서 얻은 열매였다.

데미안 p.171



  싱클레어가 만나는 마지막 사람인 에바부인은 데미안의 어머니로 싱클레어는 그녀에게서 본질적인 사랑을 경험한다. 그는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각자 자신 내면에 있는 진리와 도덕 그리고 철학을 확립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카인의 표식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표적을 가진 우리들은, 세상의 눈에는 이상한 사람들, 위험한 광인들로 비칠지도 몰랐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깨어난 사람들, 혹은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은 점점 더 완벽한 깨어 있음을 지향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 추구는, 그들의 의견, 그들의 이상과 의무들, 그들의 삶과 행복을 점점 더 긴밀하게 패거리에 묶는 것이었다. 그곳에도 노력은 있었다. 그곳에도 힘과 위대함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견해로는 우리 표적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것, 개별화된 것 그리고 미래의 것을 향한 자연의 뜻을 제시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고수의 의지 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류가,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하는 인류가 무언가 완성된 것, 보존되고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반면 우리들에게는 인류가 하나의 먼 미래,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고, 그 모습은 아무도 모르는, 그 법칙은 그 어디에도 씌어 있지 않은 미래였다.

데미안 p.194


우리가 의무이자 운명이라고 느끼는 것은 오로지 이런 것이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그것이 가져올 어느 것에나 우리가 준비되어 있음을 발견할 만큼 우리들 누구든 그토록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 속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싹의 요구에 그토록 완전히 따르며 기꺼이 살리라는 것.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독일과 러시아 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전쟁에 참여한다.  기존의 권위가 정해놓은 진리들에 따라 사람들은 패거리를 짓는다. 그리고 이 패거리들은 자신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패거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패거리 짓기는 전쟁을 야기한다.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 모두 자신의 이상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국가의 이상을 자신의 이상이라 착각하며 싸우고 있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기존의 권위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이 불러온 전쟁의 참혹성을 통해 헤세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포괄적인 사고와 이를 통한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재차 강조한다.  이분법적 갈라치기와 패거리 짓기로 인해 갈등과 혐오가 점점 심화되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시점에서 이러한 헤세의 메시지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것은 이상, 자유로운 이상, 선택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떠맡겨진 공동의 이상이었다.

고통과 쫓김이 필요했다. 언젠가 이 아름다운 사랑의 영상 안에서 깨어나 오로지 고독과 싸움뿐인, 평화나 공존이란 없는 타인들의 차가운 세계 속에서 홀로, 온전히 홀로 다시 서게 되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전투 중 부상을 당한 싱클레어는 야전 병원으로 이송된 후, 자신의 옆 침상에 누워있는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그와의 짧은 대화 후 작별을 한다.  고난의 순간마다 싱클레어가 어려움에 맞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데미안 덕분에 싱클레어는 마침내, 자신의 내면을 마주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고, 정신적으로 성장한, 데미안과 닮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게 될 거야. 너는 나를 어쩌면 다시 한번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 맞서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 넌 네 자신 안으로 귀기울여야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자라온 환경을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렇게 형성된 가치들은 대부분 기존의 권위에 의해 진리라고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의심없이 그것들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이분법적으로 나눈다. 즉, 알에 갇힌 상태에서 자신의 내면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알에 갇힌 채 자유를 잃어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생각이 진짜 내 내면으로부터 나온 건지.  기존의 권위가 정해 놓은, 그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나도 모르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런 나의 어줍잖은 관념들로 다른 사람을 평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투쟁이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 안에 있는 데미안과 함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알을 깨려는 처절한 투쟁을 이어 나아가야 한다. 그 고독한 과정에서 확립된 자신만의 도덕과 철학은  스스로의  진리를 만들어 가는 바탕이 될 것이다. 그렇게 자유로운 존재로 재탄생한 새는 훨훨 날아 '아브람삭스'에게 이를 것이다.


https://youtu.be/KH2VpBWDG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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