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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간지 Apr 08. 2022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솔제니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2539195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친구 MJ로부터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책을 추천받았다. 러시아 소설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밖에 안 읽어봐서 새로운 작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솔제니친이 소련의 강제수용소의 내막을 폭로한 소설이다. 주인공 슈호프는 2차 대전 중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 풀려 난 후 소련으로 돌아갔지만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강제수용소에 구금된다. 솔제니친은 주인공 슈호프의 강제수용소에서의 하루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수감자들의 비참한 실상, 수용소 내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또한 수용소 내에서 수용자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고 고발하는 시스템은 당시 소련 사회의 실상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생동감 있고 구체적인 묘사로 주인공의 하루가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단조로운 스토리 전개와 담담하고 건조한 문체 때문에 다소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주인공의 비극성이 부각되는 효과도 있다.   


  수용소 내에서도 수용자들 사이에 그들만의 계급이 존재한다. 인생의 밑바닥에 있는 수용자들이 그 안에서 또 자기들끼리 계급을 나누고 계급의 차별을 통해 우월감을 느낀다는 게 웃기면서 어이가 없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과 남을 구분하여 차별화하고 우위에 서려는 게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또한 계급의 철폐와 모든 인간의 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에서 계급이 존재한다는 게  모순적이기도 하다. 실제로 소련의 공산주의 가 실패한 이유도 지배계급의 부패와 무능력이라는 점은 소련식 공산주의의 전제성과 전체성이 가진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에 적응하는 수용자들에게서 강인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저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살려고 발버둥 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처절한 의지가 안쓰럽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경외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지금 현재의 삶에 다시 한번 감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이 유독 나의 흥미를 끌었던 이유는 당시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대한 폭로가 카뮈와 사르트르의 결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이 두 작가는 개인적으로 내가 프랑스 문학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두 작가이기도 하다. 당대 프랑스 좌파 지식인의 선두자였으며 정치적·사상적 동반자였던 두 사람은 스탈린 체제하에서 자행됐던 소련의 국가적 폭력에 대한 입장 차이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카뮈는 자신의 저작 '반항하는 인간'에서 인간에 대한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며 소련의 전체주의를 비판했다. 이러한 카뮈의 주장은 당시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사르트르가 편집장으로 있던 신문 "현대"지에서도 카뮈의 저작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였다. 카뮈는 이것을 두고 사르트르가 자신을 비판한 것이라 간주하였다. 이후로 둘의 논쟁은 점점 격해졌고 결국  둘의 두터운 우정은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인간에 대한 어떠한 폭력도 용납될 수 없다는 카뮈의 주장에 맞서 사르트르는 공산주의라는 비폭력 이상 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폭력적 혁명은 필수적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당시 소련의 국가적 폭력을 진보적 폭력이라

정의했다. 그러니까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인간에 대한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건데 얼핏 이렇게만 들으면 사르트르가 죽일 놈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르트르의 사상을 조금만 더 알면 그가 왜 이런 말을 했는가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전체성에 주목을 했다. 그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인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전제적 존재가 필요하다는 홉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황을 해결하려면 우선 인간의 적대감을 제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들 사이에 차이가 없는 전체성이 필요한데,  사실상 절대적 동등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만인의 투쟁 상태를 해결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혁명 시기에 바스티유 감옥을 탈취하기 위해 인민들이 하나의 동일체가 됐던 것에 주목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전제적 존재와 이를 통한 진보적 폭력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것이다.

  사르트르는 식민주의 아래 자행된 치욕과 억압이라는 구조적 폭력에 더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그러한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혁명과 해방 운동에서의 불가피한 폭력은 용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그의 사상적 배경을 듣고 나면 사르트르의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사르트르가 맞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는 거니까.

 결국 사르트르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행복과 존엄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카뮈와 공통적 목표를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있어서 둘의 사상적 견해 차이가 너무 달랐던 것뿐이다. 둘의 주장 모두 일정 부분은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 해결에 있어 사르트르는 구조적인 면에 치우쳤고 카뮈는 개인적인 면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둘 중 누구의 주장이 더 타당한가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각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보니 솔제니친의 소설부터 시작하여 카뮈와 사라트르의 절교 이야기까지 왔는데 저런 걸 보면 카뮈와 사르트르 둘 다 당대 프랑스 최고의 지식인 치고는 좀 쪼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라는 게 그만큼 무서운거구나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역시 친구들하고는 정치 얘기는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아무튼 관심 있는 분들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어 보길 권한다. 짧은 분량이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다음에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글을 써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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