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필요하다

<자기 앞의 생> La vie devant soi

by 불이삭금

한국어판 제목: 자기 앞의 생

프랑스어 원서 제목: La vie devant soi

영어판 제목: The Life Before Us

저자: 에밀 아자르 (Emile Ajar)

특이사항: 로맹 가리(Romain Gary)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평생 한 작가에게 한 번만 수여되는 콩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다. 로맹 가리의 작품으로 한번, 에밀 아자르의 작품으로 또 한 번. 상을 수여해도 에밀 아자르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모두가 비밀에 싸인 작가로만 생각했다. 로맹 가리는 훗날 자살을 하는데, 유언장에서 자신이 에밀 아자르였음을 밝혔다.


024.jpg 한국어판 <자기 앞의 생> 표지


미국에 온 이후로는 쭉 영어로 된 원서를 읽었다. 읽고 싶은 한글책을 구하기가 쉽지도 않았고, 영어 공부도 계속해야 했으니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큰돈 들이지 않고 도서관에서 원서를 실컷 빌려 볼 수 있어서 행복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한글로 읽었다. 아는 분께서 가지고 계신 책을 빌려 읽었는데, 오랜만에 한글 책을 읽게 돼 무척 기뻤다. 애쓰지 않아도 술술 읽히고 책장이 잘도 넘어가는 기분이란!


책의 내용은 슬프다. 그런데 재미있다. 웃기기도 하고, 눈물도 난다. 가슴이 아프고 한숨이 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다 읽고 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삶과 죽음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느라.


주인공 모모는 열 살 먹은 아랍계 소년인데, 68세의 늙고 뚱뚱한 유태인 로자 아줌마와 함께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7층에 살고 있다. 젊어서 그녀 자신이 창녀였던 로자 아줌마는 다른 창녀들의 아이들을 맡아 키워주고 있었다. 모모도 그렇게 맡겨진 창녀의 아이였다. 모모는 자신의 엄마와 아빠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한 번도 자신을 찾으러 온 적이 없었고, 누군가 양육비 명목으로 보내오던 돈도 이젠 끊겨버렸다. 모모를 사랑했던 로자 아줌마는 송금이 끊겼어도 모모를 다른 시설에 맡기지 않고 계속 돌봐왔다. 하지만 이제 너무 뚱뚱하고 병이 들어버린 그녀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계단조차 오르내리기 힘들었다. 그녀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걸 안 젊은 창녀들은 자신들의 아이를 찾아가기 시작했고, 아이를 맡아 기르는 대가로 돈을 받아오던 로자 아줌마는 이제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허나 모모에겐 생계가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엄마처럼, 아빠처럼 믿고 의지하고 있던 로자 아줌마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가고 있었던 게 문제였다.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를 잃는다는 건 단순히 자신의 보호자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이 다 없어지는 거였으니까.


모모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는 이 책은 얼핏 중구난방인 것 같지만 의외로 짜임새가 있고, 무엇보다도 굉장히 재미있다. 마치 모모가 눈앞에서 차를 한잔 하며 얘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 307쪽 짜리지만 편집이 시원해서 금방 읽히고, 빨리 읽을 수는 있지만 책을 덮은 후에도 생각을 오래 하게 만드는 책이다. 산다는 건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인지, 우리는 사랑 없이 살 수 있는지, 인간답게 살다가 인간답게 죽는다는 건 과연 무엇인지. 꽤 긴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


나는 이 나이에 읽었지만 (-_-;;) 정신 연령이 성숙한 십 대 후반이나 이십 대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극 추천하고 싶다.


이 책에서 가장 가슴에 와 박히는 문장 중 하나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씀일 것이다. 양탄자 장사를 하며 많은 곳을 다녀서 견문도 넓고, 아는 것도 많은 현명한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다. 모모는 삶과 사랑에 대해서도 하밀 할아버지께 배웠다. 그런데 웃긴 건, 하밀 할아버지는 책에서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거다.


나중에 모모의 입을 통해서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라고 한다거나,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서술하고 있지만, 책 속에서 할아버지가 직접 그 말을 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노망이 들기 전에도 모모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하고 묻자 “그렇단다”하고 대답하는 부분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하지만 모모는 이 말을 믿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노망이 들어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가고, 모모의 이름조차 까먹은 할아버지에게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모는 답을 이미 알면서 할아버지께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024-2.jpg 프랑스 원서 La vie devant soi 표지




나 를 깨 우 는 말 들

잠을 깨우는 모닝커피처럼

무지에서, 편협한 사고에서, 무기력한 일상에서 나를 일깨우는 말들.


* 원서로 책을 읽을 때는 원서 내용을 먼저 싣고 뒤이어 내가 직접 번역한 한글을 적었는데, 이번엔 한글로 읽었기 때문에 한글을 먼저 적는다. 원래 불어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불어를 적으려고 했는데, 내가 불어를 잘 몰라서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겨우 찾아낸 세 군데만 불어 원서의 내용을 옮겨 적었다. 여기에 나오는 우리말은 2013년 '문학동네'에서 나온 책(용경식 옮김)에서 그대로 옮겼고, 불어 부분은 2009년에 나온 책(위 표지의 책)에서 옮겼다. 불어의 특성상 악성 떼귀, 악성 그하브 등 스펠링에 여러 가지 꼬랑지가 붙는 경우가 있는데, 영어 타자로는 표기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영어 스펠링만 적었다는 걸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1.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할아버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몸에 좋다는 박하차만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어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p. 12)

"Monsieur Hamil, est-ce qu'on peut vivre sans amour?
Il n'a pas repondu. Il but un peu de the de menthe qui est bon pour la sante.
...
"Monsieur Hamil, pourquoi ne me repondez-vous pas?
"Tu es bien jeune et quand on est tres jeune, il y a des choses qu'il vaut mieux ne pas savoir.
"Monsieur Hamil, est-ce qu'on peut vivre sans amour?
"Oui," dit-il, et il baissa la tete comme s'il avait honte.
Je me suis mis a pleurer.


많은 걸 알고 있는 현명한 하밀 할아버지조차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할아버지는 그 말을 하고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모모는 그 말을 듣고 냉소하거나 비관하는 게 아니라, 울음을 터뜨렸다.
내 대답은 무엇일까. 내 반응은 어떠할까.


2.

공부를 끝내고 나서, 하밀 할아버지는 내가 좋아하는 니스 이야기를 해줬다. 할아버지가 거리에서 춤추는 광대며 마차 위에 앉아 있는 즐거운 거인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그곳에 있다는 미모사 숲이며 종려나무들을 좋아했고, 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는 것처럼 날개를 파닥인다는 흰 새들에 대한 이야기도 좋아했다. (p 48)


어려서 들었던 김만준의 노래 <모모>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아니라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모모’라는 걸 확실히 알게 해 준 대목. 1)

3.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그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화면을 맨 앞으로 돌려서 처음까지 가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중 털보 하나는 재미있다는 듯이 낄낄거리면서 그러다가 “지상 낙원까지”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덧붙여 말하기를, “불행하게도, 다시 시작해봤자 결국 그게 그거야”라고 했다. (p. 134)


영화를 되감기 해서 앞으로 돌려도, 수천번 다시 틀어도 결말은 늘 똑같다.
우리 삶은 영화가 아니다. 한번 저지른 일은 되감기 할 수 없고, 설사 되감기 했다 다시 틀더라도 똑같은 결말일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우리 마음을 뒤로 되감았다가 다시 튼다면, 우리 마음이 바뀐다면 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번엔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4.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
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p. 174 노망이 들어서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5.

그녀는 나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고, 나를 무릎에 앉히고는 세네갈 어린애들에게 들려주는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프랑스에도 자장가는 있겠지만,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자장가를 들을 만큼 어렸던 적이 내겐 없었고, 언제나 머릿속에 다른 걱정들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p. 235)

Elle m'a promis de s'occuper de moi, elle m'a pris sur ses genoux et elle m'a chante des berceuses pour enfants du Senegal. En France il y en a aussi, mais j'en avais jamais entendu parce que je n'ai jamais ete un bebe, j'avais toujours d'autres soucis en tete.


6.

나는 누군가를 인질로 붙잡아 죽이는 것 말고는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었다. 세상에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바캉스 장소를 산과 바다 중에서 선택하듯이 사람들도 그렇게 선택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 사람들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듯이,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나치나 베트남 전쟁 같은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을 선택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에 사는, 과거에 너무 고통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유태인 노파 같은 건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다. (p. 245)


7.

“넌 너무 어려서 이해를 못 하겠지만…”
“선생님,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
(카츠 의사 선생님과 대화하는 모모)


8.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난 쿠스쿠스를 무척 좋아한단다, 빅토르야. 하지만 매일 먹는 건 싫구나.”
“하밀 할아버지, 제 말을 못 들으셨나 봐요.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p. 299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어서 모모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빅토르라고 부르고 있다.)


이미 예전에, 할아버지 정신이 멀쩡할 때,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는데도 또다시 같은 질문을 하는 모모. 책에는 안 나오지만, 정말로 더 옛날에는 하밀 할아버지가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해줬던 걸까?

9.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그녀가 보고 싶다. 하지만 이 집 아이들이 조르니 당분간은 함께 있고 싶다.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라몽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p. 307)

Je pense que Monsieur Hamil avait raison quand il avait encore sa tete et qu'on ne peut pas vivre sans quelqu'un a aimer, mais je ne vous promets rien, il faut voir. Moi j'ai aime Madame Rosa et je vais continuer a la voir. Mais je veux bien rester chez vous un bout de temps, puisque vos momes me le demandent. C'est Madame Nadine qui m'a montre comment on peut faire reculer le monde et je suis tres interesse et le souhaite de tout coeur. Le docteur Ramon est meme alle chercher mon parapluie Arthur, je me faisais du mauvais sang car personne n'en voudrait a cause de sa valeur sentimentale, il faut aimer.




덧 붙 이 는 글


1)

어릴 적 좋아하던 노래가 있다. 김만준의 <모모>. (지금 찾아보니 무려 1978년 노래다. 난 왜 이 옛날 노래를 잘 아는 것인가. -_-;;) 어렸던 나는 당연히 노래의 주인공이 미하엘 엔데의 <모모>인 줄 알았다. 가사에 나오는 ‘니스’는, 비록 발음은 조금 다르지만, 몸이 작아진 뒤 기러기를 타고 날아다니며 모험을 즐겼던 <닐스의 이상한 여행>에 나오는 ‘닐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야 (“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듯이 날갯짓하며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에 대한 구절을 읽고 나서야) 이 책이 <자기 앞의 생>에 대한 노래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여기에 그 노래를 소개한다. 연식이 좀 있으신 분들은 아닌 척하지 마시고, 가사 보면서 같이 따라 불러 보시길. ^^ 아래 동영상도 첨부한다.


<모모> 김만준.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곗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듯이 날갯짓하며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을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KBS <콘서트 7080>에서 김만준 씨가 직접 불렀던 <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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