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6월
유미를 납치하려는 장면을 지나가던 사람이 촬영해 사건은 뉴스를 통해 빠르게 퍼졌다. 친일 성향의 유명 교수가 저지른 짓이라 파장이 더 켰다. 경찰에서도 수사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유미와 원석에게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두 사람은 기자를 피해 오영미의 별장으로 피신했다.
“지금까지 밝혀낸 사실과 친일파 조직에 관해 언론에 알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안 됩니다. 명예훼손으로 역공을 당할 수 있어요. 납치 사건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다 몸싸움이 났다고 얼버무리면 그만이에요. 일을 크게 만들지 않는 게 나아요. 다만 장만수가 계속 두 사람을 노릴까 걱정이네요.”
오영미가 반대했다. 말은 안 했지만 이 사건으로 서리하와 서연오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숨어 지낼 수만은 없잖아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우려한 오연식이 공격해 올 수도 있고요.”
두 사람이 걱정하자 오영미가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합시다. 정유미 기자 이름으로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신문에 냅시다. 단 친일 문제만 다루고 장만수를 비롯해 이름이나 단체를 명시하면 안 됩니다. 법적 분쟁에 휘말릴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요.”
“친일 문제만 보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장만수는 친일파고 지난번 납치 사건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있어요. 그러니 친일 관련 보도만 내도 정유미 씨를 건드리기 어려울 거예요.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장만수를 의심할 테니까요.”
“좋은 수네요. 일단 장만수가 해코지를 못 하도록 견제할 수 있으니까요.”
유미가 기사 초안을 작성했고 오영미가 일부 수정했다. 구체적으로 거명하지 않았지만 친일 단체가 어디인지 추정할 수 있도록 썼다. 오영미가 신문사로 원고를 보내고 전화했다.
“내일 아침 신문에 실어요. 너무 부각할 필요는 없어요.”
다음 날 아침 신문에 유미가 쓴 기사가 나갔다. 기사가 실리고 이틀 후 장만수 소식이 들려왔다. 열 손가락이 잘린 시체로 한강 둔치에서 발견됐다. 모자이크 처리를 했지만 얼핏 보기에도 처참한 몰골이었다. 주머니에서 비닐로 싼 언어 왜곡 숙청단 명의의 글이 나왔다. 장만수가 역사 왜곡을 일삼을 뿐만 아니라 한글을 수호하려는 시인에게까지 악행을 저질러 단죄한다는 내용이었다. 납치 사건 파장이 가라앉을 무렵 발생한 이 사건은 유미를 언론의 전면에 떠오르게 했다. 끊이지 않고 울려대는 벨 소리가 듣기 싫어 유미는 휴대전화 전원을 껐다. 어떻게 알았는지 원석의 휴대전화도 울어댔다. 다음 날 오영미가 새 휴대전화 두 대를 개통해 가져왔다.
“앞으로는 이 핸드폰을 사용하세요.” 폰을 건네주며 오영미가 말했다.
“언어 왜곡 숙청단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왜 장만수를 죽였을까요?”
“나도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여론은 그들의 바람과 반대로 흐르고 있어요. 아무리 친일이 나빠도 어떤 이유로든 살인은 용납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아요. 미망인과 어린 자식이 장례를 치르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고 여론이 더 악화됐어요. 경찰과 검찰에서도 반드시 체포하겠다고 공언했으니 곧 대대적인 수사가 펼쳐질 거예요.”
오영미 말 대로였다. 친일파도 문제지만 폭력은 용납할 수 없다는 소리가 거세져 갔다. 버젓이 친일을 옹호하는 글을 써놓고 ‘나도 죽여라.’ 하며 주소를 적어놓는 사람이 나오자 동조하는 글이 인터넷을 뒤덮었다. 범인의 단서조차 찾지 못하는 경찰을 성토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아침 일찍 찾아온 오영미가 원석과 유미에게 의논할 게 있다고 했다.
“경찰에 연락해서 자진 출두하겠다고 했어요. 전화를 걸어 방문 날짜를 잡으세요.”
오영미가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있었던 사건을 모두 그대로 말해도 될까요?”
“아니에요. 서리하 시인과 관련된 내용은 빼고 말하세요. 유미 씨는 친일 관련 기사를 준비하다 장만수를 알게 됐다고 해요. 장만수가 화가 나서 그런 행동을 한 것 같다고 하고, 살인 사건은 모르는 일이니 솔직하게 말하면 되고요.”
“저는요? 저는 문제 될 게 많은데...” 해킹한 사실을 걱정하며 박원석이 물었다.
“원석 씨는 프리랜서라 우리와 연관된 부분이 없어요. 길 가다 우연히 납치 사건을 보고 도와줬다고 해요. 장만수가 살해한 날의 알리바이도 따로 만들어요.”
“늘 혼자 지내니 집에 있었다고 하면 되는데 그 말을 믿을까요? 휴대전화 위치 추적하면 우리가 함께 있었던 게 드러나는데….”
“아, 그런 문제가 있네요. 그러면 내용을 바꿉시다. 프리랜서로 출판사 마케팅 일을 하다 평소 안면이 있는 유미 씨를 우연히 도와준 것으로 해요. 별장에 함께 있었던 것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 제가 권했다고 할게요.”
말을 맞춘 유미와 원석은 경찰서로 찾아갔다. 경찰이 숙청단에 대해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영미가 물었다.
“네. 시나리오대로 증언하니 믿었습니다.” 원석이 대답했다.
경찰서를 나와서도 유미는 우울했다. 숙청단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폭력을 우선한다면 도대체 말과 글이 왜 필요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본말이 전도된 행동이었다.
수사는 진전이 없었지만 장만수의 가족에게 유품을 전달받은 기자가 이상한 내용을 발견하고 기사로 폭로했다. 서리하 시인이 일본에 건너가 친일파로 전향했으며 나카지마 신타로라는 필명으로 혐한서를 썼다는 내용이었다. 혐한 출판사를 배경으로 여자와 찍은 사진도 공개했다. 이런 글이 신문에 실리자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다.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 민주 투사이자 민족시인의 변절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니에요. 거짓이에요. 서 시인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저들이 음모를 꾸민 것이에요.”
오영미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유미는 처음 보았다.
“사실을 밝히려면 빨리 서 시인을 찾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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