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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영 May 05. 2022

3. 그와의 첫 만남

#피자 @교보문고at광화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살갗의 상처까지도 드러내는 일이다. 아직 나의 모든 면을 보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면을 감추려고 노력하면 수상하다. 정보를 줄만한 적절한 곳은 드러내고 어쩌면 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대비해서 나의 치부도 상대방에게 언질을 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나의 치부를 드러내려면 나는 나의 아픈 곳을 알아야 했다. 아픈 곳을 머리로 알아채는 것도, 눈으로 직접 보는 것도, 입으로 말하는 것도 힘이 꽤나 드는 일이다. 그래서 나의 아픈 곳을 알아주는 사람은, 그리고 대체로 그 상처를 받아주는 사람은 나의 친구였다. 그런 사람은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

나의 연인들은 어떤가. 나는 썸남과 비슷한 상처를 지닐 때 더 많은 호감을 느꼈다. 그리고 대체로 그 호감을 시작으로 관계가 발전했었다. 그리 좋은 습관은 아닌 걸 알지만 그래도 상처를 나누면서 그 사람 자체를 이해해보는 편이다. 그런 경우에, 나는 연인이 될 사람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 우리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 감정과 태도, 사건의 해결 혹은 미해결 등등을 말했다.

어떤 상처는 다른 사람에게 “나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말함과 동시에 해방감을 느끼며 속 시원해질 때가 있다. 그런 상대방의 모습을 볼 때 그저 그가 더 행복해지길 바란다. 그럴 때 심쿵한다. 우습게도, 아니 안 우습게도. 나의 사랑은 원래 그런 식으로 유치하게 시작된다.


2019년 6월 22일. 토요일. 저녁 6시 약속.
나는 오전 일정을 미룰 수 없어서 오후에 만나자고 했고, 그와는 5시 30분쯤에 만났다. 생전 안 신는 웨지 힐에 내가 갖고 있는 옷 중 가장 불편한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Nice to meet you”라고 인사를 건네는 그는 정말 젠틀했고 멋있었다. (이변은 없었다!)
동선이 꼬이긴 했지만 우리는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갔고 그가 먼저 사둔 책도 구경했다. 그가 고른 책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전이었다. 그 책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영어로 쓰인 것이었다. 나는 영어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가지를 설명했고 다양한 대화 주제로 꽤나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은 피자를 먹으러 갔다, 와중에 우리는 피자집을 찾는 길을 못 찾았다. 우리는 걸어가던 도중에 그냥 그 화덕 피자집을 발견해서 피자를 먹었다. 그리고는 근처에 있는 서울 역사박물관에 놀러 갔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뒤편으로 경희궁이 있어서 보러 갔지만 토요일의 경희궁은 꽤나 한산했다. 그래도, 우리는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많이 걸었다.
다시, 교보문고로 돌아와서, 우리는 그 안의 커피숍으로 갔다. 그는 스무디 두 잔 샀다. 나는 오랜만에 먹는 단맛 때문에 나른해졌다. 스무디를 먹으면서 그와 나는 많은 수다를 떨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다. 마주 앉아서 보니까 그의 눈동자가 정말 예뻤다. 그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냥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내 나이 21살, 마음에 드는 외간 오라버니와 담소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25살 청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 그때의 감상을 그에게 안 물어봤다. 아마도 내 표정과 빨간 볼은 마음을 다 들켰을 것이다. 이미 그것은 숨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 25살이 아니다. 그렇지만 24살에 본인이 연초에 태어난 빠른 년생이라는 것을 어필하며…. 그래, 그렇게 그는 우리 관계에서 25살 오빠가 되었다. 그가 “내가 더 나이 많네~”라고 으스대며 이야기한 것이 기분이 꺼림칙했지만 나는 옅은 한숨을 쉬며 넘어갔다. 그가 대장질을 하려거나 권위적으로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나에게 더 매너 좋게 행동했다.
우리는 대화가 끝난 후, 나는 그를 바래다주러 같이 서울역에 갔다. 중간에 지하철을 잘못 탈 뻔했지만 다른 쪽으로 가서 올바른 방향으로 탔다. 우리는 짧은 포옹으로 이 데이트를 마쳤다.


당시의 일기를 각색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유리병에 든 달콤한 사탕을 아껴먹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알라딘의 OST, “The whole new world”를 들으면서 잠을 청했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 오 마이 갓, 말 그대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 심장이 두근거려서 밤잠 설친다는 상투적 표현이 와닿았다. 새벽에 방바닥에 몸을 이리 굴렸다가 저리 굴렸다가 난리가 났다. “어떻게 저렇게 폭닥이는 사람이 있는 거지?” 싶었다. 다정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그를 또 만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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