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의 소중한
# 호전되는 치매 친구
믿을 수 없을 만큼 앨리스의 치매 증상이 나아질 때가 있다.
특히 앨리스의 학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손녀를 생각하는 평범한 외할머니의 모습이다.
행여 당신의 손녀가 지칠까 봐 염려하는 마음, 엄마인 당신의 딸이 힘들지 않게 손녀를 뒷바라지해 주길 바라는 마음, 성취하는 손녀의 미래엔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게 순서대로 나열하듯 말씀하신다.
손녀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 앨리스의 뇌를 뒤덮고 있는 베타 아밀로이드를 녹여버리는 것 같다.
목감기에 변해버린 내 목소리를 들으시곤 딸의 안위보단 그 감기가 당신의 손녀에게 옮겨갈까 빨리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며 적극적인 치료를 하라시는 닦달의 말씀까지 치매 환자와의 대화치
곤 너무 정상적이다.
할머니의 목소리를 나중에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게 될 때를 위해 통화할 땐 녹취를 하라는 앨리스의 아이디어에 다소 기력이 있는 목소리를 내실 때는 녹취 버튼을 누른다.
언젠가 그 녹음 버튼을 다시 재생하는 때가 오더라도 슬프지 않게 그날의 감정을 담담하게 듣고 싶다.
나는 사실 앨리스가 겁이 많은 성격이란 걸 모르고 자랐다.
늘 목소리가 작지 않으셨고 아빠와의 대화에도 엄마의 의견이나 음성이 높았기 때문에 여린 여성의 느낌이라던가 나약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말수 적은 아빠의 답답함을 늘 타박하시고 신경질 섞인 목소리가 익숙하기에 여느 집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잔소리가 많은 전형적인 K-엄마의 모습이셨다.
이제 아빠가 아닌 치매와 동반자가 된 80대 앨리스는 때때로 당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여리디 여린
겁 많은 소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릿하게 저려 올 때가 많다.
나도 모르게 앨리스를 품에 안고 따뜻한 막내딸의 온기가 느껴지도록 다독이게 된다.
당신의 옆 가까이엔 언제나 든든한 딸이 있다고 안심을 전해 드리고 싶다.
# 부모 란?
소위 말하는 '적당한' 나이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스무 살이 된 앨리스와 50이 된 아직 만으로는 49세가 찍히는 나는 그럭저럭 젊은 사고와 간혹 세련됨으로 MZ들보다는 어른들과의 대화가 더 편하지 않은 길 위에 서 있다. 시댁과의 불편한 관계에 대하여 토론하는 장에서는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
시댁에서의 경제적인 도움을 당연시받으면서 시어르신들의 공경은 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의 모습은 공감
해 줄 수 없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회로가 중요하고 그런 성격 탓에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표상을
추구하는 것 같다.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감정적이지 않고 논리가 우선순위 일 순 없지만 매사 이성과 논리가 주도해 가는 일상들이 앨리스에게 T력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절대적 대상이 되고 만다.
공감 능력이 떨어져서도 아니고 오히려 깊은 공감을 하기 때문에 이성으로 감정을 펼쳐 놓지만 같은 MBTI 가 아닌 입장에선 너무 무섭거나 냉정하게 비치는 것 같다.
이렇듯 '부모'라는 존재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거나 그런 감정으로 상황을 정돈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 같은 전형적인 ESTJ 기질이 완연한 '엄마'는 주변인들을 피곤하게 만들기 쉽다.
주로는 앨리스가 힘들 수 있다. T력을 자제하거나 작은 거짓 기술로 상대방들이 듣기 원하는 반응을 보여 줄 수 있지만 솔직하지 않은 표현은 너무 어렵다. 그래서 부연 설명이 늘 동반되어야 하므로 결혼해서 생긴 말의 수가 에너지를 상당 부분 차지한다. 체력을 키워야 하는 명분이기도 하다. 오십대로 접어들어 건강관리의 유료화가 시작된 이유를 다시 한번 더 알게 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