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죠?"
"네. 그러네요."
"다른 일 보다 확인하고자 전화했어요. 이제 우진 씨와는 완전히 정리가 된 건지 묻고 싶어서요"
"저 말고 우진 씨에게 질문하면 될 일 아닌가요?"
"지원 씨의 마음이 중요한 거 같아요."
"네. 우진 씨와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어요. 우진 씨가 혹여라도 술이라도 마시고 지원 씨에게 연락한다면 받아주지 마세요. 남자가 아니어서 그 마음은 알 수 없지만 지원 씨가 강경한 태도를 유지해 준다면 우진 씨도 받아들이는데 쉽겠죠."
어느 정도는 이기적인 태도였다.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고자 하는 저런 마음은 가엽기까지 하다.
그 여자는 어린 시절 불행을 안고 자란 사람이라고 했다.
우진 씨와의 관계를 절대로 져 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
버림받을까 두려워 절박한 어린 소녀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우진 씨는 그 여자와 마찬가지로 같은 전사의 모습을 원했다.
본인을 두고 전쟁을 치르는 여자 둘 사이에서 더 강인한 여전사를 원하는 것 같다.
누군가와 경쟁하면서 내 것을 쟁취하는 일이 너무 생소하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로 친구들과의 경쟁을 해야만 하는 입시를 제외하곤 그런 적이 없는 것 같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경쟁이라.
원하지 않는 바다.
내가 그 여자보다 우진 씨를 덜 사랑해서 그런다 해도 할 말이 없다.
그 여자라는 이유보다 그 여자를 통해서 보이는 우진 씨는 내가 사랑하던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한 번뿐인 인생.
'비겁하게는 살지 말자'가 내 의식의 흐름 속에 있다.
우진 씨는 나와는 맞지 않는 남자다.
겁이 많을 수도 있고 다소 게으를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선 비굴하게 구겨질 때도 있을 테지만
비겁한 건 참기 힘들다.
적어도 남자라면 더욱 그래주길 바란다.
이별하기 위한 준비가 뭔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와의 이별이 처음도 아닌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순서가 있다면 그대로 따를 테지만 어떤 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방법을 찾기 위해 꽤나 애를 썼지만 잘 가던 시간도 더디기만 하다.
가만히 누워서 반복적인 생각만 하기보단
바쁜 게 낫겠다.
혼자 영화도 보고, 길게 운동도 하고, 퇴근 후 어디든 발길 닿는 데로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가이드를 한다면 무척 잘 해낼 자신까지 생겼다.
그만큼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장소들을 점차 알게 되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가까이에 훌륭한 곳들이 너무 많다.
그러다 우진 씨와 함께였던 곳을 지나치기라도 하면 기분이 나빠졌다.
한 순간에 오물을 뒤 짚어 쓴 사람처럼 굳어지면서 그대로 되돌아갔다.
다시 어딘가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
그런다고 이미 상해버린 모든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겠지만 어쩌다 함께였던 공간을 스칠 때마다
겨우 살려놓은 재생의 불씨가 꺼져버린다.
사람들은 이별을 한 후 어떻게 회복이 되는지 궁금하다.
해결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책이나 영화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찾을 수 없다.
바쁘게 잘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혼자만 덩그러니 바보가 된 채 서 있는 것만 같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진리는 믿고 있지만 그토록 빨리 흘러가던 시간이 딱 내 앞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