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만 가득한 주연이는 불쑥 회사 앞으로 찾아왔다.
그동안 내 연애사를 자랑스럽게 떠들지 못한 채 절교한 사춘기 소녀처럼 조용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더 길게 시간 끌 필요도 없어.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전부 그만둬. 차단하면 그만이야.
진작 끝을 봐야 할 사이였어. 애초에 시작을 안 했어야 했고"
일그러진 주연이의 표정과 함께 현재의 내가 처한 상황을 다시 한번 알게 된다.
할 말을 길게 잃은 듯 알겠다는 고개 끄덕임만 몇 차례 하면서 소주를 마셨다.
정리를 하겠단 약속을 기어이 받아내며 주연이는 자리를 일어섰다.
철없는 어린 딸을 타이르는 듯한 모양새다.
난 그만큼 어리숙하다.
하지만 우진 씨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어진다.
미움과 원망이 섞여 엉킨 마음의 실타래를 풀 수가 없다.
"잘 안 되는 게 문제야. 이성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모든 게 자신 없는 나는 목소리에 힘이 없다.
한심 섞인 걱정을 한가득 다시 안은채 돌아서는 주연이를 보고 한 동안 서 있었다.
주연이가 내 입장이었다면 난 훨씬 더 흥분하며 화를 냈을 것 같다.
참아주는 친구가 고맙고 미안했다.
'널 응원해 줄 수 없는 관계는 나도 싫어. 하지만 이건 너무 아니야.'
주연이의 문자를 읽으며 쓸쓸하게 걸었다.
내 상황이 이런 거다.
버리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는 나 자신의 문제다.
집으로 돌아와 자석에 이끌리듯 소파에 바로 앉았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든 무거움이 내려앉는다.
커튼을 활짝 열고 세상에 밝게 켜진 불빛들이 스며든다.
나와 상관없이 모든 건 질서 정연하게 밤을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온전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다.
평범함의 평안함이 몹시도 그립다.
어느 것 하나 걱정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저 일 뿐인 내 일상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찾아가던 서점.
신간과 베스트셀러를 오가며 읽어보고 관심 있던 작가의 고전을 다시 살펴보던 그때가 이젠 꿈처럼 아득하다.
원한다면 언제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내가 싫어진다.
이렇게 차츰 나를 잃어가는 것만 같아 두렵다.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인 걸 와닿게 깨닫는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내가 되는 게 싫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깨지는 것만 같다.
내 가치관, 세계관, 인간관이 모래알처럼 얇디얇은 조각이다.
나를 위한 게 무엇일지 다시 돌이켜보고 싶다.
세상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사랑을 하고 의미 있는 것을 추구했던 어느 시절의 내가 그립다.
기대했던 사랑이 그만큼 쓰라린가 보다.
사랑의 완성이라고 하는 결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만큼 가까웠던 꿈을 잠시 가져보았다.
어릴 적 앞만 보며 생각 없이 달리다 곤두박질치며 넘어져 생긴 깊은 상처처럼
아물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할지 모르겠다.
조용했던 그 여자의 소식이 난데없이 날아들었다.
어쩐지 한결 젊잖게도 느껴지는 그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