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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령 Jul 06. 2024

살아있다는 느낌

정세랑 <피프티피플> 서평

이 소설집은 현실적인 인물들이 돋보였던 것 같다. 설정이 허술하면 몰입이 깨질 수도 있는데, 글을 읽으면서 작가가 의료계를 잘 아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색함이 없었다. 병원이 주는 특유의 부산하면서도 긴장되는 느낌과 병원 조직의 보수적인 면을 잘 표현했다. 아마 작가가 병원에 대해서 많은 조사를 했을 것 같다.

50명이 넘는 인물의 이야기를 촘촘히 넣어서 소설집을 만드는 것 하나의 모험이다. 틀을 깨고 새로움을 계속 추구해 나가고 싶은 작가의 의지도 함께 느껴졌다.


세 편(기윤, 혜정, 성진)의 이야기를 인물들의 욕망을 중심으로 읽어보았다.




몸 안의 것에 중독된 삶이 몸 바깥의 것에 중독된 삶보다는 나은걸까. 기윤은 가끔 궁금해했다. 언제나 아드레날린이 삶의 전반을 지배해왔다. 서너살에 높은 계단에서 뛰어내릴 때부터, 일곱 살에 말도 안 되는 경사에서 눈썰매를 탈 때부터 그랬다. 더한 자극과 위태로운 위기를 원했다.
철이 덜 들어서 그렇단 소리를 들었지만 기윤은 자기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이었다. 변함없이.
“응급실 선생님 한분도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던데. 병원에는 센 운동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나의 신규 간호사 시절이 떠올랐다. 한창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하던 신규 시절, 롯데월드에서 자이로드롭을 탄 적이 있다. 나는 원래 놀이기구 타는 것을 안 좋아하는데 그때는 자이로드롭에서 훅하고 떨어지는 순간이 짜릿하고 좋았다. 공중에 심장을 두고 떨어지는 것 같은, 숨이 멎을 듯한 느낌이었다.



심폐소생술을 하고 나면 찾아오는 참기 어려운 허기를 해결하며 기윤은 자신의 안쪽에 설치된 급경사의 레일을 점검했다. 참담함의 한 가운데에서도 오르락내리락 달리는 기괴한 롤러코스터를.
태어난지 고작 나흘 된 아기가 죽은 날이었다. 산모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턴 하나가 복도에서 울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던 나는 병원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암에 걸린 환자들은 열심히 치료받아도 죽었다. 나에게 나쁘게 대하는 환자도, 착하게 대해주는 환자도 몇 번의 항암치료를 받고 나면 비슷한 경과를 거쳤다. 내가 열심히 일해도 경과가 안 좋은 환자가 많았다. (물론 건강해진 환자는 더는 입원하지 않아서 내가 보지 못하는 영역에 있었을테지만.)



피가 너무 많이 나서 오히려 피 같지 않았다. 남자의 상처 부위에서 새어나온 밥알을 보았을 때야 실감이 났다. 반쯤 소화된 밥알이었다.
이제 와서 다시 한번 반쯤 녹은 밥알의 감촉을 떠올렸다. 잊을 것이다. 다음 주쯤 되면 말이다.
살아 있는 벌이 있었다. 살아 있는 벌과 눈이 마주쳤다.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삶과 죽음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천진하면서 무지했다. 죽음이 나의 환경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으면서 그저 두렵고 불안했다. 자이로드롭은 나에게 죽을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 역설적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것이 그 시절 내가 자이로드롭을 좋아했던 이유이다. 살아있다는 느낌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평소에는 느끼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인물들의 주된 욕망은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알았다가도 금방 잊혀지는 ‘살아있다는 느낌’이지 않았을까?


살아있다는 느낌을 원한다는 것은 반대로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는 말도 될 수 있다.

삶과 죽음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움으로 인해 죽음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병원은 너무 자주 벌거벗은 죽음을 마주하는 공간이다. 때로는 슬퍼할 시간도 없어서 마음이 무뎌지기도 한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처럼 ‘살아있는 느낌’을 욕망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달려가기 직전, 성진은 생각했다. 나는 이런걸 하기엔 돈을 너무 조금 받아.
모두 성진이 비정상이라고 말했다.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가족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전할 수 있다면 했다. 성진이 얼마나 제정신인지를 말이다. 이토록 분명한데.



최저시급을 받는 계약직 보안요원이자 성소수자인 성진의 ‘살아있는 느낌’은 ‘인정받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인물을 통해 이야기의 주제 의식이 병원 바깥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통해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익스트림 스포츠, 아드레날린이 물리적인 신체의 살아있는 느낌을 구현한다면 인정받는 것은 정신적으로 살아있는 느낌을 구현하는 것이다.



성적 취향만큼 이런저런 복합적인 차별의식을 뾰족하게 드러내는 게 또 있을까.
인턴은 모르고 있었다. 기윤에게도 작지 않은 크기의 타투가 두어개 있다는 것을.
요즘은 타투 정도로 일반인과 조직폭력배를 구별하기는 어렵다.
50대 남성인 정형외과 교수가 폴댄스를 배우고 있었다니 혜정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안 그래도 우리 직업은 왜곡된 시선 앞에 자주 놓이는데 왜 그랬어. 하고 동료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이상하게 바라보는 쪽이 나쁜 거 아냐? 왜 당하는 족이 조심해야 해? 속으로만 생각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빈곤, 차별, 편견, 폭력 등 성진의 인정 욕망을 방해하는 다양한 요소가 나타나있다. 이 중 편견에 대한 서술이 인물마다 들어있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굳이 나누자면 성진은 편견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는 입장이고, 기윤은 편견을 경계하는 사람이다. 혜정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기윤과 혜정의 이야기에 걸쳐서 인턴(현재)이 나오는데, 인턴은 어떤 부분에서는 편견이 있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편견 없이 행동하기도 한다.


나는 편견을 경계하는 편이다. 내가 사람들의 단면만 보고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한 인간이 좋은 면만 혹은 나쁜 면만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나와 다른 사람들을 괴물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나빠 보이는 사람의 일면에도 내가 배울 만한 점이 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어차피 얼굴을 마주 보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이번 글쓰기 과제였던 ‘충돌하는 인물 쓰기(상반되는 두 가지 설정을 동시에 가진 인물쓰기)’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견을 이용해서 글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에 스스로가 편견을 갖는 것을 경계하고 있어서 나는 편견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편견을 갖지 않겠다는 마음이 스스로를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글을 쓰며 편견이 없다는 생각보다는 편견을 인식하고 벗어나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쓰고 있는 소설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면>에 대해서 말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온전한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인간은 가시광선 영역만을 인지할 수 있고, 내가 보는 것은 물체가 흡수하고 반사한 빛의 파동 일부이다. 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것은 몇천 광년 너머 빛의 흔적을 보는 것이다. 내가 보는 것과 실제는 시간적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나는 시각 정보를 불신하는 편이다. 그러한 불신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소설 속에 나오는 한 인물과 대중은 시각적 정보만을 의지하거나 자기가 보고 싶은 면만 본다. 편견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토록 편 가르기가 수월해진 세상에서 예술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예술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절대 납작하지 않고 입체적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말해야한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다양한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인정하게 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예술을 보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을 믿고 받아들이기보다 주체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낼 때 작품은 더 아름답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세상을 더욱 입체적이고 아름답게 보는 안경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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