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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령 Jul 03. 2024

짭생 인간 생존기

뭐하러 열심히까지 해. 그냥 해.

독서 모임에서 누군가 자신은 직장에서 ‘짭생’을 살고 있다고 해서 엄청나게 웃었다. 너무 공감했기 때문에.


짭생 이야기가 나오기 이전에 우리는 <나는 매일 시체를 보러 간다>의 저자 유성호 교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책은 법의학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교수님이 직업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성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유성호 교수님을 대학원 수업에서 직접 만난(영접) 적이 있다. ‘찐생’을 사는 자의 후광이 났다. 그 비슷한 후광을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계약직 간호사 시절 나는 이국종 교수님과 같은 건물에서 일했었고, 복도에서 이국종 교수님을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바쁜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그에게서도 찐생을 사는 사람의 후광이 빛났다.


찐생 인간과 짭생 인간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찐생 인간은 일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성장하는 사람을 말한다. 반면에 짭생 인간은 알량한 돈을 벌기 위해 동태 눈깔로 책상에 앉아서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자들을 말한다. 짭생 인간에게 일과 직업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다. 시간을 팔아서 돈을 사는 느낌이랄까. 워라밸(워크 라이프 밸런스)이라는 말은 짭생 인간이 만들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가? 처음 나이팅게일 선서를 할 때만 해도 간호사로 찐생을 살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남의 돈을 벌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이직을 거치고 나서 깨달았다. 직장이란 어디를 가나 거지 같구나. 4년 전에 지금 직장에 입사하면서 생각했다. 그럴싸하게 포장된 봉사 정신이나 사명감 같은 말에 다시는 속지 않는다. 나에게 병원은 그저 돈 버는 곳, 간호사는 돈을 버는 나의 직업일 뿐, 병원 밖이 진짜 내 삶이다. 그렇게 나도 짭생 인간이 되었다.


짭생을 다짐하고 나서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최대한 아무 생각 없이 집과 일터를 오갔다.

내 직장생활이 찐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시절에는 퇴근 후 일하면서 있었던 나의 실수를 하나하나 곱씹었다.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날도 있었고, 출근하기가 너무 싫어서 견딜 수 없는 날도 있었다. 억지로 버스에 올라타서 눈물짓던 시절. 그때는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내가 젖은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진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많은 일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이를테면 백혈구 수치가 낮아서 면역관리를 위해 멀쩡히 걸어서 들어온 환자가 항생제 주사 투약 후 돌연 사망한다든지, 나에게 항상 친절하게 웃어주시던 중년의 부인암 환자가 항암을 진행하던 중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져서 사망하는 일 같은, 예상치 못한 죽음들이었다. 결정적인 일은 불행하게도 내가 담당하던 환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15살 소녀에게서 벌어진 일이었다.


말기 혈액암 환자였던 소녀의 상태가 조금씩 악화되는 와중에 섬망 증세가 왔고 보호자의 요청으로 진정제를 투여했다. 나는 고통스러웠던 그때의 상황을 뇌의 자정능력으로 조금씩 지워내서, 지금은 정확한 상황을 기억할 수 없지만 떠올려보자면 이렇다. 소녀는 진정제 투약 후 호흡이 저하됐다. 내가 처치를 위해 병실로 들어갔을 때 인턴 의사가 태연하게 드레싱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소녀의 손가락에 꽂아둔 산소포화도 기계는 불안한 알람 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그걸 본 나도 울고 싶었다. 당시 소녀의 병실은 복도 끝에 있어서 나는 간호사실에서 병실까지 여러 차례 왕복하며 뛰어다녔다. 소녀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담당 의사에게 연락했다. 내가 몇 번을 뛰어다니던 그 순간까지 인턴 의사는 태연하게 드레싱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쟤는 뭐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담당 의사가 오기 전까지 나 혼자 뭔가와 싸우는 느낌이었다.


소녀의 상태는 눈에 띄게 빠르게 악화되었다. 고용량 산소요법에도 산소포화도는 조금씩 떨어졌고, 소녀의 어머니는 오랜 간병 생활에 지쳐서 서서히 소녀를 보내줄 준비를 했다. 당시 소아청소년 환자는 연명치료 거부 동의서를 서면으로 작성하지 않고 구두로 받았다. 의사의 설명에 소녀의 어머니는 연명치료 거부를 구두 동의했다. 의식이 없는 환자 곁에 가족들이 모여서 작별 인사를 하고 나자, 소녀는 먼 곳으로 떠났다.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서 나를 이때까지 지탱하고 있는 것은 소녀의 주치의였던 소아청소년과 교수님의 말 한마디이다. 교수는 소녀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삶과 죽음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입니다. 어머니도, 우리도 모두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죄책감 느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은 나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암 병동에 있다 보면 내가 간호하는 환자들이 암 환자인 것을 이따금 잊게 된다. 다들 생각보다 슬픔에 빠져있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고 치료받는다. 찐생을 추구하던 나는 그들을 간호하며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환자를 잃을 때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환자들이 저렇게 젊은 나이에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다니. 어머니를 위로하던 교수님의 말에서 비로소 나에게 벌어지고 있던 모든 일들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20대 초반에 경험한 수많은 죽음은 트라우마처럼 나에게 차곡차곡 쌓여있다.




어느 프로그램에서 이동진 평론가는 말했다. “거부감을 느끼는 말이 워라밸이다. 일과 삶 사이에 조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전제는 일은 삶이 아니라는 것.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데서 행복해야 한다." 그는 자기 일을 사랑하는 찐생 인간이 틀림없다.


사랑한만큼 상실감이 깊어지는 것처럼, 나는 내 일을 사랑할수록 어쩐지 더 슬퍼졌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곳에서 나는 행복할 수 없었다. (아픈 환자들을 보면서 행복하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찐생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 일을 겪고 난 후 나는 간호사가 내 길이 아님을 인정하고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영영 간호계를 떠날 줄 알았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나는 짭생 인간이 되어 6년만에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짭생 인간 간호사로 여전히 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지킨다. 이제는 그들의 죽음에 크게 마음쓰지 않는다. 그저 나의 일과 시간과 그들의 일생이 잘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한다. 짭생 인간으로 일에서 배우는게 없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인내하고, 일과 마음의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운다. 물론 잘 안될 때도 많지만, 어든 나는 누구보다 내가 무너지지 않고 건강하길 바란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듣고 이쯤에서 일을 그만둬야하나 하는 고민도 들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돈 받고 하는 일이란 대체로 힘든 것이 아닌가? 행복한 일을 하는 곳에서 많은 돈이 나오겠는가? 원래 노동의 속성은 괴로움이고, 괴로운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돌아간다.


난 워라밸과 짭생을 지지한다.

나는 당신이 동태 눈깔로 요령껏 일하고, 덜 무너지고, 조금만 상처받고, 최대한 행복해지길 응원한다.



*이 글을 일터에서 동태 눈깔로 시간과 싸우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짭생 인간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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