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만 아는 한 가지 마음속 단어

기쁘다

by 맑은날의 무지개

어릴 때부터 말을 잘하지 못했다.

어느 반에나 있는 유난히도 내성적인 아이가 그 반에는 바로 나 였다.

친구를 사귀는 것은 학교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고,

교실 안에서 눈에 안 띄려고 책상과 의자에 붙어 웅크린 자세는 어른이 되어도

그대로 여서 늘 키보다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이 다 늦은 저녁때나 들어오실 때까지 다문 입은

하루가 다 지나도록 말 한마디 안 하고 보낸 날들도 많이 있다.

인사를 하고 나면 어떤 말을 이어가야 할지 인사 전부터 고민이 되어서

먼저 알아보면 미리 피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누군가와 말을 해야 하는 것은 내게는 많은 고민과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십대 초반 까지도.


그래서인지 전화는 불편하다.

어떤 말이 나올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준비할 수 없는 전화는 불편하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차이보다도 그냥 전화통화는 불편하다.

내가 걸어야 할 때는 상대가 원활하게 통화가 가능한 상황인지 생각하다가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9시쯤은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신없을 것이고

11시 30분이 넘으면 통화가 길어지다가 점심에 늦어지면 큰일이고

마찬가지로 5시 30분 이후에는 퇴근이 늦어질 수 있으니 등등

갖은 생각으로 조금 이따 조금 있다가 하다가 해야 할 전화를 까먹고 만다.

받는 경우는 반대로 내가 같은 걱정을 하느냐고 안 받고 미루다 놓치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만큼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 혹은 울려야 하는 것이

내게는 불편함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전화

그것은 부모님의 안부통화도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도 아닌

바로

면접 후 걸려오는 전화 .


면접 후 전화가 오는 것이 [기쁘다.]

보통은 합격은 전화

불학격은 문자나 연락 없음 이기에

결과가 나올 쯤에 걸려오는 지역번호가 적혀있는 전화는 대부분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광고다.


가장 최근 나를 기쁘게 만든 전화는 이번 여름이 막 시작하려는 때였다.

이곳에는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보잘것없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구인광고를 본 것은 5월이었고 나도 5월에 이력서를 내었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공고 마감일이 되어도 읽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갈 곳이 아닌가보다.' 하며 낙담하고 지냈는데 한 달 후 구인관련 기관에서

구인소개 문자가 왔다.

바로 그 곳이었다.

나는 겸허히 받아들인 척하고 있었으나 이미 한 달이나 심술이 나 있었기에,

'아니 떨어뜨릴 수는 있어도 이력서는 읽어봐야지!! 읽지도 않고 사람을 또 구해!!'

'얼마나 대단한 사람 뽑나 보자, 흥!!' 그랬는데 알고 보니 내가 이메일 주소를 잘 못 쓴 것이고

그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바로 내가 되었다. = = v


그렇게 내게 기쁨을 준 전화도 이제는 정해진 계약 기간이 다가와서 다시금

대부분의 광고를 포함한 지역번호 전화를 기다릴 시간이 되어간다.

기쁘다.

광고 전화가 와도 기쁘다.

나를 소개하고 나를 다짐하고 나를 포장, 한 시간 뒤에 나를 선택해 주는 전화를 기다리는 것이

기쁘다.

기쁘다는 말을 기쁘다는 감정을 표현할 일은 너무도 많겠지만,

결과를 기다리고 답을 알려주는 전화를 기다리는 일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다.



면접까지는 많은 힘이 들지만,

기다림은 [기쁘다]

그리고 사실 네 전화를 기다리는 것도 무척이나 [기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