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하다
박카스가 청춘을 외치던 2000년대 초
그들은 하얀 바탕에 파란 무늬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국토대장정을 하였고
이내 걸음으로 우리 땅을 담을 수 있는 행위는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다음 카페에는 비슷한 국토대장정을 목표로 하는 카페들이 존재하였고
나 역시 박카스 국토대장정에 떨어진 후, 다음 카페 모임을 찾았다.
우리의 일정은 2주간, 부산 송정해수욕장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걷는 것이었다.
최소 1주일 전부터 걷는 연습을 하라는 지도부의 말을
귀찮음으로 무시하고 홀로 부산으로 내려가던 날.
큰 방에 둥글게 앉아 어색하게 인사하고 서로를 탐색하던
청춘들.
누군가 틀어놓은 티브이에서는 만화 원피스가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티브이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미리 걷는 연습을 하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였는지
다음 날부터 알 수 있었다.
생각 같지 않았던 행군은 20대 초반의 남녀에게도
서로 입을 닫고
길을 따라 걷도록만 만들었다.
거의 한 시간을 걷고서야 무릎을 굳혀 엉덩이를 바닥에 닿을 수 있었다.
그것의 반복 또 반복
첫 날, 많은 불만이 나왔다.
둘째 날, 셋째 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일주일.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그 사이 내 발은
발바닥의 2/3가 물집으로 자리해서 운동화를 질질 끌며 다니다가 바닥이 구멍 났고
돈은 없고 신을 수도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길가에 있는 상설매장에서 가장 싼 운동화를 새로 사서
길을 이어갔다.
매일 밤이면 실을 꼽아 물집의 물을 빼고 다니다 보니 나름 적응되었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발톱이 문제였다.
뜨고 빠지고 걷는 동안 피가 계속 새어 나와
하얀 운동화가 빨간 운동화로 곱게 칠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하루가 줄어드는 것이 슬프기까지 했다.
우리는 매일 저녁, 가방을 내려놓는 시간이 찾아오면 삼삼오오 거리로 나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렸다. (물론 노래방에서.}
그렇게 마지막 날이 오고
그렇게 각자의 곳으로 향하고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 첫날을 기억했다.
미리 걱정하고, 이내 포기하고
뒤돌아 외면하고, 쭈그리고 숨었던 시간이
여전히 내게 남았겠지만
조금은 늘었던 나이만큼
마주하고 이겨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인천터미널에서 부산 가는 버스 표를 살 때도,
부산에 도착해서도
누군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용기를 낼 때도
나 역시
포기하고 싶었다.
포기할 용기가 없어서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고민을 하다가도
포기를 생각하는 순간은 여전히 담겨있어
아직도 나아갈 길이 멀구나 하면 한 숨도 쉰다.
그렇게
나에게는 갈 길이 남아있다.
포기하는 것보다 가져가는 것이, 이겨내는 것이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고개 숙이며 내쉬었던 한 숨이
하늘을 보며 외치는 기합이 된다.
나는 그 첫날을 떠올리고
나는 그 중간을 떠올리고
나는 그 마지막을 떠올린다.
멈추지 않았던 나의 걸음을 기억한다.
그 모든 순간을 [그리워한다]
한 걸음이라도 잊을까, 질질 끌며 이어나간 걸음에도 그리움이
매일 점심이 라면이었어도 누구도 불만없이 남김도 없이 넘겼던 한 끼에도
불꺼진 방에 누군가의 코골이를 들으며 웃음으로 화답하던 순간도
그리움으로 채워져있다.
나의 시간은 그 곳에 놓고 온 듯 멈춰있지만
어느덧 그들은 다 잊혔다.
카톡에는 보여도 굳이 말을 걸 이유가 없는 사이가 되었다.
매일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에게 청춘을 담아오던 우리는
아프지만 청춘이라 말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각자의 삶에서
떠올릴 그날의 여름이
징하게 힘들었지만, 그 역시 행복했음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이면 좋겠다 싶다.
떠오르는 이름들, 그 이름을 가진 이들이 나를 성장시켰다.
봄의 시작이라 말해도
토 달 사람 없는 삼월의 첫날.
문득
그 여름의 첫 날이
우리의 걸음의 첫날이 떠오른다.
#그리워하다_사랑하여 몹시 보고 싶어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