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나는 페미니스트가 된 것 같다.

페미니스트....

글쎄... 특정 색깔을 가진 것 같아서 쓰기에 부담스러운 단어였다.


사은 나는 페미니스트가 뭔지도 잘 모른다. 공부를 해본 적도 없고 기관이나 조직 활동도 해본 적 없다.

그저 누군가의 불편이나 희생이 당연한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의 성인지 감수성을 가지고 살고 있을 뿐이다. 다만 한쪽으로 과하게 치우친 듯한 느낌을 주는 어감이 나에게 좀 부담스러운 정도....


난 합리주의자??? 혹은 상식 주의자?? 정도의 선을 걷고 싶다.(그렇다고 페미니스트가 합리주의자나 상식주의자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표면적으로 의견을 많이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결혼 전까지도 그냥 상식적인 선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서는 자꾸 투쟁적인 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뭐라고 생각하고 결혼을 한 걸까?



결혼 9년 차

올 한 해 워낙 다사다난하기도 했고 여러 변화가 있던 탓에 우리 가족 모두 아주 힘들었던 시간이다. 그중에서도 나와 남편의 관계가 가장 큰 이슈였다. 신랑에게도 큰 변화가 너무 두려웠을 것이고 또 힘겨운 시간들이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당장 터진 일과 상황에도 버거울 거라는 것을 알지만.... 나머지 가족들 역시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은 겪고 있었다. 온 가족이 겪는 이 고통과 어려움에 함께 해주고 이겨내줘서 고맙다는 배려의 말 한마디가 그리 아까운 건가... (지나 보니, 그 한마디 하기 어려울 만큼 자신 앞의 문제가 커 보였던 시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라리 아이들이 어려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편안했던 일상은 변했고, 상황을 수습하고 생활을 꾸려가는 당장의 일은 다 나의 몫이었다. 워낙에 워커홀릭인 남편인지라 원래도 집안의 대소사나 일정은 잘 못 챙겼는데, 큰 사건이 터지니 사건 후의 일처리는 온전히 내 몫이 되어 숨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결혼 후 지금까지 계속 2인분의 몫을 해나가야 하는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아이들 2명에겐 엄마 역할 말고 아빠 역할까지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보내지 못하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은 결국 내 몫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부족한 시간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사건을 계기로 나는 지난 9년간의 나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것을 느꼈다. 나의 목을 탁탁 치는 찰랑거림...

한 방울만 더 떨어지면 완전 버닝 돼버릴 것 같은 그 위태로움, 물 잔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느낌이였다.


그저 지금 바쁘니, 지금은 어려우니, 지금은 연말이라, 지금은 사건사고가 많아서..... 그때그때 참고 넘어갔던 시간들이 어쩌면 한 장 한 장 쌓이더니 두꺼운 사전처럼 내 가슴을 꽉 짓누르고 있었던 것 같다.


결혼 9년간의 서운함은 묻어두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올해 들어와서 절실히 알게 되었다. 언젠가 조금씩 삭아 없어질 줄 알았는데... 그 간 쌓여있던 서운함은 화가 되고 내 가슴을 내리치는 도끼가 되고 그리고 나의 영혼을 갉아먹는 비수가 되었다.


아이들이라는 선물이 얼마나 귀하고 존귀한지 알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고 싸우는 부분이 바로 육아였다. 나와 네가 아닌 부모로서의 역할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을 때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지나 보니 이 역시도 온전히 나의 기준과 시선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남편으로서의 서운함은 접어두고라도 아빠의 역할이 무너질 때 가장 상대에 대한 상심을 크게 느끼는 것 같았다. 책임감의 부제로 확장 해석하기도 했다.


나도 엄마가 처음인데, 언제까지 내가 아빠의 역할까지 공부하면서 알려줘야 하는 건가? 아빠가 되기 위한 준비는 자기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알려준 거라도 해야 하지 않나? 끊임없이 부족한 부분만 눈에 띄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내 입장에선 아니까 한없이 부족하고, 신랑 입장에서는 아는 게 없으니 부족한 게 없다 느꼈다. 자기 주도가 아니니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육아의 대부분을 다 담당하고 정말 최소한이라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도 매번 우쭈쭈를 건전지처럼 넣어야 하는 건가? 단순 내 남편 한 명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나만 그러는 거 아니지??)


여러 결혼 선배들이 하는 말 중 남편을 달래서 쓰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나는 참 그 말도 듣기가 싫었다. 사춘기 아이 달래는 것도 아니고 나보다 나이 많은 남편을 달래서까지 써야 할 일인지...


내가 육아의 99% 를 다 할 때 칭찬 한 번을 못 들어보는데 누구한텐 당연한 일이고 누구한텐 이게 칭찬할 일인가? 그냥 부모가 되기로 한 이상 그 몫을 반반 나눠 감당해야 하는거 아니야? 그래서 99%의 육아를 하고 나면 매번 당하는 기분이 든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무슨 일이 있을 때, 아이를 맡기는 건 항상 엄마의 몫이 된다. (다 가정마다 다르지만 지금까지 우리 집의 상황은 그렇다) 1도 고민 없는 남편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강남에 2시 약속을 가기 위해 나는 아침 8시부터 나선다. 동탄 친구 집에 아이들을 맡기고 다시 돌아와서 차를 놓고 강남까지 가기 위해 몇 시간을 소비하고 가야 하는지...


물론 시댁과 친정 어디 하나 손 내밀 곳 없는 상황인 것이 가장 우리 집 육아의 치명적 단점일 수도 있다.

이런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켜켜이 쌓인다. 그리고 미련퉁이같이....


지금에서야 왜??? 결혼이라는 걸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나의 결혼생활 9년이 모두 암흑기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행복하지 않은 것이냐고 물으면 행복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다만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왜 나는 결혼이라는 것을 하기 전에 왜 잘 몰랐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우리 사회는 결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거나 부모가 되는 과정과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학교생활 12년 동안 알려주거나 고민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면 누군가와 거의 60년~70년의 생활을 함께 해야 하는데 그리고 부모가 된다면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난 단 한 번도 제대로 듣거나 이야기를 들어보진 못한 것 같다.


우리 부모님들은 그냥저냥 맞추면서 평탄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안 하셨을까?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이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할까 봐 미리 쉴드를 치신 걸까?


요즘 시대에 자식을 가르칠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라고 하는데 그런 교육과정을 받고 나서 결혼생활에서의 육아를 감당해야 하는 시간에 여자들은 더없는 좌절감을 맛보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왜 산후우울증이 오냐고? 호르몬도 호르몬이지만 누구도 살면서 이렇게 정체되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시기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일 것 같다. 엄마라는 타이들로 자신을 내어주고 헌신하는 시간을 당연히 할 일이라고 여기며, 모성애라고 포장하면 당연히 산후우울증이 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라는 여자 사람이 엄마라는 이름으로 이런 자괴감이나 상실감을 갖는 것만으로도 모성애 없는 엄마 취급을 당하는 사회적 상황이 폭력적이다.


이게 단순히 개인의 문제라고 하기엔 우리 사회가 짊어져야 할 과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육아가 누구 하나의 일이 아니기에 함께 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엄마가 우울증에 걸려있다면 아이들이 건강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나에겐 딸과 아들, 둘 다 있다. 그리고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우리 딸아이가 결혼을 하고 이런 생각이나 문제에 나처럼 봉착할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회구조적 문제들에 좌절스럽고 억울하다고 느낄까?


나는 결혼에 대해서 행복함과 더불어 감당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음을 미리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도 내가 어떤 결혼 생활을 꿈꾸는지, 그리고 그 꿈꾸는 방향이 같은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할 적절한 배우자를 찾아야 한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고 싶다.(나 역시도 이런 고민을 했지만 좀 더 현실적이고 치열하게 고민하지 못했던 것 같다. ) 심지어 나는 내가 엄마가 될 거라는 생각도 결혼 전에 딱히 떠올려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여자 사람이다. 분명 나의 딸아이도 마찬가지 일 것 같다. 그런데 엄마라는 이름으로 겪어야 할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고 그 길을 걷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일 것 같다. 선택에 있어서도 자신의 책임을 되돌아볼 것이고 또 돌파구를 찾아나갈 것이라 생각한다.


결혼생활에 대한 고민들을 지금이라도 민감하게 느끼고 질문해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런 근본적인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시간들이 있어야 나 역시도 배우자를 더욱 잘 이해하고, 또 부모라는 나의 역할에도 좀 더 그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갈 것 같다.


나뿐 아니라 또래에 태어난 여자라면 겪고 있을 이런 고민들을 홀로 외로운 투쟁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사회적 이슈와 제도로 현명하게 풀어나가는 것이 우리의 숙제라 생각한다. 불편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어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시점에는 좀 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가사분담과 공동육아가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의도치 않게 나는 결혼 후 페미니스트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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