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모셀베이로 출발이다. 가는 길이 너무나 아름답다. 최종 목적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도 있겠지만 그동안 달린 구력(?)이 있어서 그런지 살포시 풍광도 눈에 들어왔다.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어두워지면 표지판을 읽기가 어려워 길 찾는데 아주 곤란해질 것 같다. 가는 중간에 타조들이 방목되어서 키워지고 있었고 멀리 보이는 나무들은 자유분방한 모양으로 우거져 자라고 있었다.
이 자유스러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 멀리 산을 따라 구름들이 정말 장관이었다. 소용돌이치는 허리케인 모양의 구름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아프리카는 구름까지 저렇게 야생적인가? 하는 생각에 엄마와 감탄에 감탄을 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 사이로 구름들이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그 경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앞으로 나가고 있다. 아프리카가 좋았다. 이런 멋진 풍광들을 일상적이게 볼 수 있는 것이 좋았고, 우리가 좀 더 자유로워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그 자연스러움이 좋았다.
한참을 달려 나갔다. 차량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았다. 모든 차량들이 비상등을 켜고 달리고 있었다. 반대편 차량들은 안개 등을 켜고 살금살금 지나갔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모슬 베이로 향하는 길은 험준한 산과 꼬불꼬불한 길로, 대관령 산맥보다 더한 길을 운행해야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오… 마이 갓!!
모슬 베이로 가는 단 하나의 길이 이렇게 험준하고 위험한 구간 인 줄은 지도만 보고는 알 수가 없었다. 그 구간에 들어서자 거대한 압도감이 몰려왔다. 앞은 안개로 자욱해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의 얼굴은 이미 긴장되어 사색이 되었다. 차량 손잡이를 꽉 잡았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직진뿐이었다.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속 평지에 가까운 길이라 시동을 꺼뜨리면서도 부담 없이 왔는데 오르막에서 시동을 꺼트린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뒤로 밀리는 차를 생각하니 뒷목이 서늘해진다. 수동을 운전해봤던 엄마는 스틱 운전을 말로 설명하시기 시작했다. 차가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필사적으로 시동을 꺼트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순발력이 떨어지는 나이의 엄마가 운전을 할 수도 없고 어쨌든 지금까지 내가 운전을 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운전을 할 수밖에 없다.
안개 등을 켜도 3~4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아까 그렇게 멋있다며 소리를 지르며 사진을 찍던 그 폭포수 같은 구름이 바로 이 곳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인 줄도 모르고 그리 멋지다 환호성을 치다니… 역시 사람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는 말이 이럴 때 하는 말인가 보다. 아까 아프리카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던 그 상황이 이렇게 다른 맥락으로 나에게 다가올 줄이야…
액셀을 밟고 있는데 속도는 나지 않고 꼬불꼬불한 길 때문에 몸은 긴장으로 굳었다. 브레이크와 엑셀 그 어떤 것에서도 발을 떼지 못하고 그 중간 즈음을 누르며 달려 나간다. 길을 따라 온몸을 움직이다 보니 슬슬 다리에 쥐가 나려고 했고 종아리 근육들이 당기기 시작했다. 참다 참다 엄마에게 SOS를 쳤다. 근육들이 뭉치는 것 같다고 했더니 다리를 주물러 주시면서 원래 수동이 이래서 많이 피곤하고 힘들다면서 손을 멈추지 않으셨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 살포시 안개가 걷히는 구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내리막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아. 주여… 저절로 감사가 나왔다. 그 꼬불거리는 구간을 올라오면서 시동한 번 꺼트리지 않고 온 것 만도 너무 다행이었고 안개가 꽉 찬 구간을 지나오기만 한 것도 너무나 감사할 일이었다. 살면서 안개가 낀 도로가 이렇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엄마와 나는 내리막으로 향하는 길에서 소리를 지르며 통성기도 수준의 감사를 외쳤다. 이제 모슬 베이까지는 10킬로 남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기억이다. 10킬로를 지나서 모슬 베이에 들어섰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직 숙소에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부담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엄마의 일기에는 그날의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었다.
“눈 앞에 큰 산맥 건너편에 구름이 내려와 환상으로 보인다. 또 옆 산맥에는 무슨 커다란 폭포수처럼 구름 자락이 내려와 차 안에서 사진 셔터를 눌러 댔다. 한참을 고지대로 오르고 있는 데 반대차들이 모두 나이트를 켜고 온다. 차가 탄력이 없이 힘이 빠진 다기에 크러치를 저단에 놓고 발을 한 번씩 붙였다 뗐다 하라고 말로 소정이에게 설명했다.
소정이가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겁이 났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까 산에서 내려온 구름이 모두 우리가 가는 길을 덮어버린 것이다. 소정이는 인터넷에서 안개지역이 있다고 들었지만 이런 것이냐며 놀랬다.
우리들은 또다시 간이 콩알만 해지고 온몸이 초 긴장이 돼서 기도했다. 모슬 베이 30킬로라는 팻말이 보인다. 얼마나 이런 구간이 계속될까?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달리고 있다. 모슬 베이 10킬로라는 표지판을 보고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백패커를 찾아가는 여정이 남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았다는 기쁨 때문인지 이제 평지에서 시동을 꺼트리는 건 문제가 안되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고 상점에서 길을 물어보면서 묻고 묻고 겨우 오늘의 숙소인 PARK’s house를 찾을 수 있었다. 저 멀리 4개짜리 별을 단 간판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긴장이 풀렸다. 울 것 같은 마음으로 들어갔다. 젊은 여자분에게 부킹 체크를 부탁하고 방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별 4개라 워낙 인기가 있는 숙소였는데 외관은 그냥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정말 주인 손이 안 간 곳 없이 아기자기하고 가정집 같은 편안함이 깃든 숙소였다. 소품 하나하나도 적재적소에 여행자들을 배려하는 여러 가지 편의시설들도 참 맘에 들었다. 고풍스러운 나무 창문부터 뒷마당까지 예쁜 공간이었다.
이런 숙소니 여행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겠다 싶다. 엄마랑 둘러보면서 이런 게스트 하우스를 한국에서도 하면 좋겠다고 했다. 누군가의 여행에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이 된다는 것이 꽤나 근사하고 멋있었다. 선한 영향력의 확장 같은 느낌이랄까? 더구나 호스트의 친절함은 지친 우리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렌터카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걸 이야기하니 센터에 전화하면 가지러 올 수 있는지 여부를 체크해준다고 했다. 너무 다행이었다. 기름을 넣고 다시 렌터카 업체를 찾아가는 그 여정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호스트의 제안에 이 모든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하루를 살았는 데 10년을 산 것 같은 하루였다.
밖에서 요란한 경적소리가 들려온다. 아… 직감적으로 우리 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숙소 간판을 보고 차에서 무작정 내려버렸는데 골목의 한가운데 그것도 남의 집 주차장 앞이었던 걸…. 잊고 있었다. 미안하다며 차를 뺐다. 역시나 급발진으로 시동을 걸고, 차를 빼 주었다. 숙소 앞 주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힘이 빠지면서 긴장이 풀어졌다.
우리 방으로 돌아왔다. 엄마랑 나는 박수를 치고 껴안으며 감사 기도를 했다.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가며 마음을 졸였던 우리를 위한 축배를 들기로 했다. 또 가까운 곳에 Harbor가 있다고 해서 산책 삼아 둘러보고 오기로 했다. 다시 살아온 날이라 생각하니 더없이 오늘이 소중했다. 막상 걸어서 나오니 금세 깜깜해져서 약간은 겁이 났다. 호스트가 매우 안전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했기에 나이즈나에서 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Harbor를 향해 가는 길에 눈여겨보던 레스토랑을 찜해 놓고 돌아오는 길에 들어갔다. Café Havana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꽤 있었다.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안은 너무 엔틱하고 분위기가 좋아서 우리는 분위기에 심취해 버렸다. 엄마랑 나는 둘 다 술이 젬병이다. 그래서 여행 다니는 내내 기분을 내려면 한 병을 시켜서 얼음물에 타서 마시곤 했다. 오늘도 역시 기분 내는 날이다. 이 지역의 유명 맥주인 WINDHOOK을 오늘은 각 1병씩 시켰다. 살아 돌아온 날인데 한 병 정도는 마셔줘야 하지 않겠냐면서…
모슬 베이는 홍합이 유명한 지역이다. 홍합이 들어간 시푸드 플래터를 시켰다. 맥주에 걸맞은 안주가 나왔다. 나중에 보니 오늘의 스페셜 메뉴에 스테이크가 눈에 띄었다. 나중에 본 것이 아쉽긴 했지만 여러모로 충분히 즐길 만큼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 이모들 이야기, 엄마는 왜 연애를 많이 못했는가? 같은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서로를 너무 칭찬해 주었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의 여행을 딸을 믿고 따라와 준 엄마에게 감사했다. 어떤 누가 그 연세에 이런 여행을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고 인생 최대의 모험을 즐겼다며 웃으며 축하할 수 있을까? 내가 운전하는 동안 엄마가 불평불만을 하거나 차 타기를 거부했다면 우리는 또 어떤 여정으로 키를 돌렸어야 할지 모르겠다. 오금을 저리며 페달에 발을 떼지 못하는 그 순간에 나에게 힘을 준 엄마에게 감사하고 할 수 있다며, 잘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준 엄마의 그 믿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게 아닐까 하며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내가 엄마 딸인 것 역시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진정 오늘은 지옥과 천당 사이를 오간 것 같다.
지금 5살 우리 딸이랑 여행을 떠나는 날이 오려나? 아직 화장실도 혼자 가기 어려운 딸아이다. 매번 화장실 좌변기에 올려주며 딸아이를 쳐다보니 엄마에게도 나를 이렇게 보던 시절이 있었겠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요새 매일 엄마와의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나는 엄마의 나이가 되면 누구랑 어떤 여행을 떠나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떠올려본다.
나의 작은 바람이 있다면 아이들과 매년 일 년에 한 번씩 국내가 되었던 국외가 되었던 한 달 살기를 하고 싶다. 일상의 일정에 쫓겨서 달려가는 시간 말고 오로지 아이들과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시간을 소망해본다. 그리고 이렇게 아이들이 커서 성인이 되는 20살에는 아이들과 세계여행을 가고 싶다.
그때 나는 나의 아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나의 딸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시도가 많은 요즘이다. 1학년이 되는 아들에게 삶의 태도를 가르쳐 주고 싶어서 잔소리를 하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저 내 삶의 태도를 보고 배울 아이들을 생각하면 내 삶 하나만 제대로 꾸려가도 그게 아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한 가지가 아닐까 싶다. 내가 지금 우리 엄마에게 보고 받은 그 성실함이 잔소리로 이루어지지 않은 걸 생각해보면 말이다.
아직 실행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여행이지만 아이들과 떠날 세계여행은 눈을 감으면 나에게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엄마가 더 나이 들기 전에 엄마와 또 다른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뽐뿌가 오는 순간이다. 코로나야... 이제 좀 가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