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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냐 미국이냐, 그것이 문제..일까?

by 조이한


미국 영주권을 신청해두고 서울에 와서 한동안 일을 했다. 나에겐 8년만의 서울살이였다.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 했던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을 자주 만났다. 정말 반가웠다. 코로나 시기가 끝나고 모임, 여행이 다시 자유로워지던 시기와 맞물려 나를 맞아주는 사람들의 설렘도 다소 부풀어 있었다. 8년이라는 세월은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엔 다소 어색해질만한 세월이었지만 서로가 아주 낯설어질 만큼 긴 세월은 아니었다. 시간이 무르익고 이야기가 흐르면 세대와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든 던지는 질문을 던졌다.


“미국이 낫지?”


“한국이 살기 편하지 않아?”


처음에는 말문이 막혔다. ‘무조건 미국이 좋지!!’, ‘한국이 최고야’ 같은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응당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질문 같아 더 당황스러웠다. 나는 다른 나라에 정착하기로 결정했으니 ‘미국이 좋다’고 주장해야 하는 걸까. 한국에서 살아갈 사람들이니 한국이 좋다고 편을 들어줘야 할까. 나조차 결론 낼 답이 없으니 적당히 눈치껏 다소 어리버리하게 “뭐 그렇지”로 상황을 모면했다.


깊은 대화를 잘 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은 친구가 탈조선이 답이고 한국에 묶인 자신이 망했다는 자조를 쏟아냈다. 또 다른 친구는 이렇게 편한 삶이 있는데 애써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이유가 뭐냐고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답이 없는 토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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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이는 식당에서 친구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보니 ‘나는 왜 한국이 아닌 곳에 정착하고 싶어할까? 그게 꼭 미국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부끄럽게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보다 “이민”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일까. 미국에서 유학했으니 그 기회를 따라 정착하고자 할 뿐 꼭 미국이어야 한다고 여긴 적은 없다. 한 때는 미국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절차가 빠른 캐나다 영주권 지원을 염두해두고 아이엘츠 시험도 치르고 유럽, 아시아 지역 채용공고에 지원한 적도 있다. 그러니 나의 선택은 한국이냐 미국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냐 아니냐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왜 한국 밖이어야 할까. 다소 비약을 섞어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이방인의 삶이 “편해서”일 것이다. 밖에서의 삶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편했다. 타국살이는 분명 더 많은 책임과 불확실성과 고립을 요구함에도 나는 편했다. 영주권을 신청할 때만 해도 이 선택의 이유가 간단하게 느껴졌다. 다시 서울에 돌아와 일을 하면서 ‘혹시나 내 마음이 돌아서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때때로 들었다. 현실은 상상보다 꽤 괜찮게 느껴졌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런데 그 생각들의 끝에는 언제나 ‘그래도 일단 다시 나가보자’ 싶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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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도 길지도 않은 8년간의 미국생활동안 어떤 이들은 내가 이민을 선택한 그 이유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적응하지 못해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기회를 가지고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미국만이 답이라고 생각하여 어떻게든 남으려는 사람들, 또 다른 삶을 찾아 캐나다로 뉴질랜드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떠난 사람들을 보았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구는 한 단어로 말 할 수 있고 어떤 이는 밤을 새도 모자란 이야기를 쏟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금 복기해보니 더 이상 이 선택이 흑과 백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에겐 백인 답이 누군가에겐 흑일 수 있고 누군가의 흑색은 내게 백일 수도 옅은 회색, 혹은 짙은 회색 언저리의 불투명함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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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친구들과의 토론이 깊어질 수록 나의 의문은 다른 방향을 향했다. 우리도 나이가 들어서 일까? 아니면 원래 우리의 대화가 이분법으로 흘렀었나? 싶을만큼 각자의 답이 정해진 듯한 토론이 이어졌다.


“한국은 집값이 너무 올라서 뭘 할 수가 없어.”


“맞아”


“미국은 아무데서나 총 쏴 사람 죽이잖아”


“그것도 맞지”


“사람들이 애도 안 낳아. 미래가 없어 이 나라에는”


“우리가 출산율이 많이 낫긴 하지”


“보험있어도 수술하면 몇 억이라며. 어떻게 그런 곳에 살아.”


“진짜 그래. 엄청~ 비싸”


답을 정해놓은 상대방을 대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네 말이 맞아’와 같은 모호한 태도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두 나라의 삶을 동시에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묘사도 완전하지 않다고, 이런 결론적인 묘사는 모두 처한 상황과 원하는 삶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전체를 아우를 수 없다고 말해야 했을까. 하지만 이미 감정적으로 완결된 판결에 논리적인 반박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더 이상 없어 보였다.


한국 아니면 미국, 여기 아니면 저기, 우리 아니면 그들, 세상이 모와 도 두 종류로 나뉜 것 처럼 결론을 내야 하는 걸까? 친구들과 헤어져 한강을 건너 집에 오는 내내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시의 밤은 내가 떠났던 때보다 어두워졌는데 서울 땅 위의 삶들은 불이 꺼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유학을 결심하기 전에 나는 “우리”의 테두리 안 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유학도 그 “우리” 안에 들어갈 자격을 위한 절차쯤으로 여기기도 했다. 서울을 인생의 유일한 선택지로 여길 때, 나는 수도권 방 3개짜리 아파트에 거주하는 대기업 정규직의 삶을 꿈꾸며 사는 인생 밖에 보지 못 했다. 내려올 수도 올라갈 수도 없는 사다리 위에 매달린 느낌, 메뉴가 하나 뿐인 식당에서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계속 먹어야 하는 운명에 갇힌 느낌은 오랫동안 나를 조여왔다. 인생이 두 개의 답안지만 준비된 삶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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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 오랜 세월이 걸렸다. 옅은 회색이어도, 짙은 회색이어도 괜찮다고 느끼게 되기까지. 온전히 혼자가 되어 보는 것. 낯선 사람이 된다는 것. “우리”가 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 극단적인 고립의 경험은 신기하게도 떠나온 땅에 색을 입혔다. 타인의 선택은 ‘예스와 노’, ‘있음과 없음’, 우리와 그들’처럼 간단해 보이지만, 선택의 과정과 흔적은 우리를 다른 모양, 색으로 만든다. 시간에게는 이 선택들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어디에 살지, 삶을 꾸릴지 결정하는 것도 사실 이야기 속, 한 장면일 것이다. 이방인의 삶이 알려준 것인지, 시간이 가르쳐준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결론은 지금 내릴 수 있겠다. 삶을 쥐고 있는 사람의 인생에는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 그저 어떤 선택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상황에 쫓겨 어쩔 수 없는 선택부터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내리는 자유 의지의 표상같은 선택까지. 아무리 무거운 선택도 결국 하나의 선택이고 우리의 이야기는 하나의 선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선택의 무게를 덜고, 완결문으로 쓰여진 정답을 찾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도 되지 않을까.


여러 달의 시간이 지나 미국으로 돌아와 다시 그 날의 토론을 되짚어본다. 다시 낮밤이 바뀐 세상속을 살아가는 우리들 각자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았다. 답안지를 보려고 하지 않고,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면 좋았을 그 밤이 아쉽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와 시간들이 허락되길' 바라는것 만이 이방인이 꿈꾸는 선택의 결과라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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