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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의 다온 Aug 02. 2023

내 나이 스물일곱, ADHD 진단을 받다.

성인 ADHD 검사 이유와 진단 과정

성인도 ADHD가 있다는 사실, 정확히는 ADHD를 방치하면 성인기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유튜브 '닥터프렌즈'의 현직 의사가 ADHD라는 사실과 구체적인 증상을 알기 전까지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ADHD를 진지하게 의심하고, 난생처음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여 진단을 받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과 계기가 필요했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ttention Deficit/Hyperactivity Disorder, ADHD)
: 아동기에 많이 나타나는 장애로, 지속적으로 주의력이 부족하여 산만하고 과다활동 및 충동성을 보이는 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시작은 올해 2월, 아이슬란드 여행이었다.
2주 동안 네 가지 물건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열에 아홉은 "으이그, 그러니까 조심 좀 하지..."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에는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


원래 물건을 잘 잃어버렸던 나는 카드 지갑에 꼭 필요한 카드와 신분증만 챙기고, 도난 방지용 힙색까지 야무지게 챙겨 메고 여행길에 올랐다. 파우치와 지퍼백으로 용도별 분류까지 완벽했다. 그러고도 비행기 안에서부터 여권이 잘 있을까, 혹시나 티켓을 떨어뜨린 것은 아닐까 수시로 확인했으니, 이쯤 되면 ADHD가 아니라 강박이 의심될 정도다.


그런데 도착 1시간 만에 국제 운전면허증을 잃어버린 것이다. 렌터카를 빌릴 때만 해도 있었는데, 차를 타는 과정에서 떨어뜨린 듯하다. 그렇게 숙소에 온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드라이브가 될 뻔했지만, 다행히 렌터카 회사로부터 복사본이 있으니 괜찮다는 답변을 받아 링로드를 돌 수 있었다. 여행 도중에도 립밤과 장갑을 분실했지만 여행의 순간들이 좋아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날 카드 지갑까지 잃어버리자, 정말 ADHD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 것이다. 사실 그나마도 친구가 챙겨준 덕분에 적게 잃어버린 것이었다.


아이슬란드는 시작일 뿐이었다. 2달 뒤 여행에서는 또 지갑을 잃어버렸다가 되찾기도 하고, 아끼던 목걸이를 호텔에 두고 왔다. 이사 오기 전날 절제 없이 술을 마신 탓에 숙취에 시달리며 최악의 날을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그날 겉옷과 립스틱 2개까지 잃어버리고 한동안 엄청난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관심사에 몰입하느라 대학원 한 학기를 망치고, 모아둔 돈까지 펑펑 써버렸다. 그러다 문득,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인생이 완전히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의심을 시작하자 '나는 왜 이모양일까' 자책하던 문제들의 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ADHD로 의심한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1. 물건을 자주 잃어버린다.
2. 해야 할 일이나 마감 일자를 잊어버린다.
3. 외출할 때 물건을 빠뜨려서 꼭 2~3번씩 다시 들어왔다 나간다.
4. 관심사가 매우 자주 바뀐다.
5.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행동한다.
6. 자제력이 약해서 돈을 모으는 것이 어렵다.
7. 관심 있는 것 외에는 거의 집중하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몇 가지는 그저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특징일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이러한 성향이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했을 정도로 분명하다. 특히 충동성의 영향이 컸다. 중학교 시절의 방황, 고등학교 때 뮤지컬 배우의 꿈을 갖게 된 일, 고3을 앞두고 결정한 휴학과 자퇴, 인문대학 진학과 극단 활동, 매번 새로운 일들을 찾아다니고 다시 진로를 바꾸어 교육대학원에 오기까지… 큰 줄기만 보더라도 참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이처럼 하고 싶은 건 당장 해야만 하고, 관심사가 다양한 덕분에 많은 경험을 쌓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지금까지는 '도전 정신'과 '결단력'이라며 나름 긍정적으로 여겨왔다. 덕분에 우연히 찾아오는 기회를 붙잡은 일도 많았고,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해냈기 때문이다. 원체 낙관적인 성격이기도 해서 여느 때처럼 인생이 나를 가야 할 길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편이 쉬워서 합리화했던 게 아닐까. 문제는 애써 외면한 채 말이다. 열아홉 살부터 거의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모아둔 돈은 없고, 오히려 갑작스러운 대학원 진학으로 인해 학자금대출만 불어나고 있다. 1년에 최소 두 번은 술로 인한 흑역사를 생성했고, 연애를 하더라도 감정기복이 심해 격랑이 끊이지를 않았다. 수많은 경험을 했지만 모두 제각기 흩뿌려 놨을 뿐 뭐 하나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다. 잃어버리고 놓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문제에 맞닥뜨릴 때면 언제나 성격, 잘못된 습관, 부족한 의지를 탓하며 고쳐야지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방심하는 찰나의 순간 실수는 반복되었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ADHD로 인해 노력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답을 듣기 전까지는 끝없이 안갯속을 헤매는 듯했다.




심각성을 깨닫자 그토록 망설여지던 정신과 방문도, 검사비도 상관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병원에서의 상담-검사-진단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먼저 상담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디테일했다. 병원에 오게 된 이유부터 증상과 관련한 에피소드, 주변인들의 의견까지 자세한 질문이 이어졌다. 특히 어린 시절에 관한 질문이 많았는데, 부모님께 주로 혼났던 이유는 무엇인지,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기억, 주위의 평가는 어땠는지 등 굉장히 디테일했다. 질문에 답하며 기억을 되짚다 보니 문제가 더욱 명확해지는 듯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의사 선생님은 상담만으로도 ADHD가 유력하다고 평가했다.


검사는 <K-CAARS 26, 버클리 집행기능결핍척도, TCI 기질 및 성격검사, 뇌파검사 qEEG, 전두엽기능 컴퓨터테스트>의 5가지를 받았고, 총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검사가 끝나자마자 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다. 모든 결과는 일관성 있게 ADHD를 가리키고 있었다. 특히 <버클리 집행기능결핍척도>에서 '자제 혹은 억제'가 99% 이상, <TCI 기질 및 성격검사>에서는 자극추구 기질이 100%, 그중에서도 충동성과 무절제가 최고점으로 나왔다. 또한 뇌파검사 결과 집중도 지수가 상당히 낮았고, 컴퓨터테스트 역시 집중력이 낮고 충동성이 높게 나타난 것이다.




진단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ADHD.


의사 선생님은 진단을 받으니 기분이 어떤지, 예상했던 결과인지를 물었다. 나는 예상했던 결과라 무덤덤하다고 답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오히려 후련하고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과학적이고 임상적으로 입증된 검사를 통해 지금껏 삶을 피곤하게 만들었던 문제들의 원인을 확인하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ADHD는 약물 치료가 약 7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 사실도 내게는 위로가 되었다. 전문가와 약물의 도움을 받아 치료해야 하는 '질병'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명확한 원인을 찾았으니 이번에야말로 정말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시작했다. 약물은 가장 낮은 용량부터 시작해서 매주 조금씩 용량을 늘리고 있다. 사실 1주 차는 독감에 걸려서 컨디션 변화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2주 차부터는 잡생각의 빈도가 조금 줄어든 것 같다. 인지행동치료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ADHD는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아동기부터 이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완전히 치료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건강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치료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나 자신을 더욱 잘 알아가고 싶다.


앞으로 내가 ADHD로서 경험한 삶과 치료해 나가는 과정을 기록하려 한다. 혹시나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작은 도움이나마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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