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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Feb 23. 2021

거리예술, 관객, 접근성

바깥이라는 장소성이 불러일으킨 공공성이라는 착시






질문을 받는 일이 좋습니다. 그럴듯한 답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결국 뻔한 답을 하는데도 그렇습니다. 나중에 오래오래 듣는 사람 없는 답을 혼자 작성할 때, 그것을 소란스럽게 자꾸만 고치면서 간직할 때, 오 답이 좀 그럴듯해지는 것 같아, 라고 착각할 때.


한국거리예술협회라고 좀 멋진 에너지를 가진 곳인데, 소속마저 멋지게 학술팀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또 제가 공부는 못하면서 학술이나 학자, 연구 같은 단어에 욕심이 많아요? 그래서 늘 멱살을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 그래서 낙오되면서? 그러니, 이번에도 또 욕심을 냈습니다.




거리예술과 공공성과 장소성에 관한 질문들이었어요. 이게 많이 변했는데… 한번 얘기해보겠느냐고 하셨어요. 당장은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뭐라도 쓰려고 보니 저는 정말 뭐가 변했다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어째서 거리예술의 공공성과 장소성이 변했다고 하신 거냐고 되묻는 게 없어 보여서 그렇게 하지도 못했고요. 딱히 풍성한 논의도 없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게 변했네 아니네 판단할 수 있나 싶기도 했고요. 물론 코로나19를 가지고 얘기하면 되려나 싶었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변화라면 이제 말하기도 지긋지긋했거니와 그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뭐 늘 하는 생각 하나가 떠오르긴 했습니다. 공공공간을 포괄하는 거리라는 장소가 마치 그 자체로 공공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착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요. 그 둘이 너무 붙어 있어서, 그 사이에 뭐가 빠졌는지 못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요.


예를 들어 《96%》라는 작업은 억압된 몸, 괴물 같은 몸을 다루었어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대한 칭송을 오점 없는 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은유로 삼기 위해 (굳이) ‘옥상’을 공연 장소로 택했고 ‘움직임’ 기반의 ‘오디오’ 퍼포먼스를 ‘관객 참여’형으로 진행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몸을 억압하고 몸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들ㅡ접근성 나쁜 건물과 공간, 텍스트 안내 없는 오디오, 정상성에 근거한 신체 사용ㅡ의 집합이었습니다. 많은 걸 빠뜨렸어요. 아니, 다 빠졌어.


보통 거리예술은 비싼 관람료를 낼 능력이 없어도,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따로 시간과 노력을 쏟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누구나’가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현대의 도시는 비장애-이성애-성인-남자를 `일반인`으로 상정한 기획 하에 계속해서 어떤 표준을 만들어내잖아요. 이윤 지향적인 도시 발달에서의 표준은, 대중을 중산층과 상류층만의 “자격 있는 대중”으로 한정되고요. 일반 대중이란 말은 이주민, 노동자, 자영업자, 영유아, 장애인, 여성 등을 포함하지 못하고 있지요. 극장에서 볼 수 없는 몸들은 거리예술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겁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영어 전담 자원활동가를 따로 두기도 하는 거리예술행사에서 배리어프리 논의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걸 보세요. 도심 공공공간에서의 배제가 어떤 식으로 기획되고 거리예술이 가담해 왔는가를 드러낸다고 말하면 무리일까요. 물리적인 벽이 없다고 벽이 없는 건 아닌 거죠. 그건 아이와 함께 공원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갔을 때, 휠체어를 타는 친구가 서울광장의 공연을 보러 가는 걸 부담스러워 할 때 너무 절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직접 겪고 듣고서야 깨닫게 되었다니. 아이러니하게도 최근에 벽을 없애는(barrier-free) 노력은 거리예술을 밖으로 나오게 했던 벽 안의 극장에서 더 착실하게 수행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거리예술이 “누구나”라는 말을 계속 뭉뚱그려 사용해도 될까요? “누구나”란 표현 속에 이미 그어진 구획과 삭제된 계층을 제대로 인식하고 작업이 반영하지 않으면 결국 "일반 대중 누구나"라는 이상적인 개념 바깥의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꼴이 됩니다. 물론 어떻게 진짜 한 공연이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 있겠어요.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위한 작업이 있다면 저런 사람들을 위한 것도 있고, 뭐 그러면 좋겠습니다. 작은 광장들이 여럿 있어서 어디든 하나는 갈 곳이 있도록.


왜냐면, ‘예술은 이렇게 좋은 것인데 극장이나 미술관 밖에서도 즐길 수 있어요’ 라고 적당히 대중들에게 안내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세계를 다르게 보고 경험함으로써 이해와 성찰의 힘으로 이어지기는 자리가 거리예술이라고 믿는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저는 정치적인 발언의 장소이자 전통적인 규범과 미학을 벗어나고자 했던 거리예술이 실천과정에서 놓친 걸 회복해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토론 과정에서 예산상의 어려움에 대한 지적이 나왔고 그러자 이런 인식의 과정이 있으니 해결책을 찾아나가자는 얘기도 나왔고 정부지원체계나 축제의 공연 선정 과정에서 배리어프리와 관련한 가산점 제도를 제안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특정장소 공연까지 포함하는 거리예술에서 애초에 접근이 어려워 방치되어 온 공간을 쓰는 경우도 많은데 이럴 경우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고민도 되었습니다.


말과 말이 더해지니까 뭔가 희미한 실체라도 보이는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저기서 나오는 모습도 좋았고요. 여러 말을 덧대고 이어나가 구체적으로 달라지는 현장에 아이랑 같이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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