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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Jan 02. 2021

진정성 퍼포먼스 Ⅰ

피켓라인





1.

1980년 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그 날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다면? 그것은 광주 민주화 항쟁의 대안적 목격자로 양성되었다는 의미다. 나는 그것을 본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로 자랐다.


내게 광주에서 자란다는 것은, 수업 중에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선생님을 조르다가 도망치던 시위대를 안방에 숨겨줬던 일화를 듣는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단체로 보러 간 공연의 제목에서 어렵지 않게 “봄날”이나 “오월” 같은 단어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무대에서 이상한 화장을 하고 화를 내듯 시위대를 연기하는 국어 선생님을 마주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일반사회 시간에 선생님이 출력해온 진보 언론의 기사를 함께 읽는다는 뜻이다. 일 년에 한 번쯤 축제 중인 충장로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해 본다는 의미이다. 도청 앞에 황폐하게 남아 있는 전일빌딩 옆 건물에서 학원 수업을 듣고 그 앞 정류장에서 집에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누가 붙들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군가가 치른 목숨 값으로 살아 있음을 느꼈다. 나의 고향은 억울함과 영예로움이 바짝 붙은 죽음의 역사가 깊이깊이 새겨진 도시였다. 그 도시 사람들은 일정량의 분노를 품고 있었다. 나는 그 기본값의 분노를 배웠다.


2.

하지만 불의에 대항하는 시위 같은 건 현실에서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너무 사소한 이유로 밀대를 휘두르며 우리를 멍들게 하거나 조용히 무릎과 귓불을 만지는 선생님들 앞에서도 별말하는 법이 없었다. 어떤 민주화 운동의 후예들은 기대와 다르게 평범하거나 혹은 그 이하였다. 난감했다. 이미 분노를 전수한 것이 분명한데 설명서에 내용이 없었다. 대신 그 표지에 새겨진 두려움만 또렷했다. 내가 보고 들은 시위는 모두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바친 것이어서, 나는 늘 두려웠다. 분노를 연료로 삼아 정의가 뭔지 분간해냈지만 그다음에는 되도록 가만히 있는 날들을 보냈다. 생을 바치는 일은 생각만 해도 벌써 무서웠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에는 몽쉘통통을 사 먹고 집에 가는 길 버스에서 시끄럽게 웃는 열일곱 살이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다섯 식구가 모여 앉아 과일을 먹으며 뉴스를 봤다. 높은 탑 위에 오르거나 식음을 끊는 필사적인 시위를, 때로는 목숨과 바꾼 시위의 중대함을 보도했다. 불의에의 대항이 그런 거라면 나 같은 범인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크로 잘라 놓은 복숭아 조각을 가져와 입에 넣었다. 그건 아직 너무 딱딱했다.


3.

2007년부터 나는 서울에서 지냈다. 그건 곧 대부분의 수요일마다 서울 어딘가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수요집회는 뉴스로만 봤다.


4.

2008년 5월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조치에 반대하는, 이른바 광우병 집회에 참여했다. 먹고사는 일이 아무리 급해도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잖아. 나와 친구는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만났다. 한 시간 정도 행진했다. 걷다가 구호를 외치다 멈추다가 우왕좌왕했다. 이게 다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모르는 많은 사람의 무리에 섞여 물대포를 쏘는 경찰을 멀리서 지켜봤다. 첫차 시간이 되자 원룸으로 돌아갔다. 피로한 얼굴로 학식을 먹다가 역시 전라도에서 와서 시위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엄마에게는 문자가 왔다. 행여 ‘그런 곳’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조금 헷갈렸다. 오후 수업에서는 브레히트의 시를 배웠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5.

2016년부터 2017년까지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가 공식적으로 스물 세 차례 열렸다. 나는 누구보다 그의 퇴진을 원했으나 집회에는 세 번만 참석했다. 페이스북에도 뉴스에도 온통 집회 소식뿐이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촛불은 `모두`를 `하나`로 만들고 있었다. 집에 있는 동안에, 나는 '모두'도 '하나'도 되지 못했다. 몸이 아파서, 일이 많아서, 쉬고 싶어서, 출장지에서 집회에 나가지 않은 토요일은 어쩐지 외로웠다. 친구와 동료들의 시위 인증이 쏟아졌다. 하루는 피로에 지친 몸을 눕히고 페이스북으로 중계를 봤다. 침대 밖을 상상하기 힘든 몸의 무게와는 별개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어떤  무게에 짓눌렸다.


무엇보다도 현장에 가지도 않으면서, 추위 속에서 함께 구호를 외치지 않으면서 뭔가 주장한다는 건 허위였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수혜만을 누리게 될 터였다. 그런 생각들이 뒤엉키는데, 불쾌했다. 세상에 자기 사정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말이 들렸다. 차이에 너그러운 사람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예외를 엄단했다. 나는 나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죄의식이 느껴졌다. 다르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차별이 없어져야 하지만 진정성의 모양만은 다르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불 끈 방에 있었다. 가만히 손톱만 한 피켓을 만들었다.


6.

80년 5월에 엄마는 뭐했어? 아빠는?


나는 지금까지 두 사람에게 그런 걸 물어보지 못했다.  



2021년 1월 2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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