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풀타임 작업실을 가진 적은 없었다. 작업실이 정말 어떤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작업 공간이라는 의미라면 말이다. 작업실이 있을 때도 거기서 딴짓을 더 많이 했다. 조금 더 조용하고 쾌적하게 허튼짓들을 할 수 있었다. 막상 공연 날짜가 임박하면 거실에서 밤을 새우고 그랬다.
처음부터 내 작업실은 하루 가운데 겨우 몇 시간을 내어 꾸린 것이었다. 회사에 다닐 때 일이다. 어느 날부턴가 출근할 때 마시던 커피를 퇴근할 때 마셨다. 퇴근길, 카페에서 샷 추가한 라떼를 사서 지하철에 탔다. 음료를 들고 지하철도 버스도 탈 수 있던 시절이다. 그걸 홀짝이며 지하철에 앉아 휴대폰에 글을 썼다. 집에 돌아오면 책상 앞에 앉았다. 아무도 의뢰하지 않은 그림을 그리거나 대본을 써봤다. 그러다가 지금까지 왔다. 그러니 애초에 퇴근 후 파트타임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니 하루에 몇 시간씩을 내어 집에서 일하는 건 원래 그렇게 될 일이었다. 이 전염병의 시대가 내게 쥐어준 틀은 아니다. 혼자 작업하는 것은 외롭지만, 여럿일 때 앞과 뒤를 구분 못하다 여울에 빠지는 곤란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집에서 혼자 작업하기는 내게 알맞다. 아니다. 사실은 아이 둘과 함께 있다. 사실은 재택을 하는 남편도 종종 함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첫째 아이가 저 혼자 노는 동안 소파에 앉아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 구글 문서를 열었다가 둘째 아이를 재우느라 불끈 침대 옆에 웅크리고 앉아 휴대폰으로 다시 그 문서를 열어보고, 모두가 잠든 후에 다시 거실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다시 같은 문서를 열어본다. 내 눈에만 보이는 이 시공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열렸다 접힌다. 서로 다른 자리의 내가 동시 접속한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쓰고 편집한다.
친구가 둘째를 낳은 나에게 《예술하는 습관》이라는 책을 선물해 주었다. 바르다가 아이를 낳고 집에만 있을 때 그 상황에 맞춰 찍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그 짧은 글을 여러 번 읽었다. 내 방이 없지만 거실이 있다. 조금 지칠 때는 다시 그 책을 꺼내 읽을 것이다.
하루를 미세하게 쪼개 쓴다. 밤이 오면 오래된 컴퓨터의 윈도우 관리 도구 속 '드라이브 조각 모음'을 실행하듯, 낮에 거실 곳곳에 제멋대로 뒹구는 어떤 조각들을 찾아내 이어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