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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Jan 09. 2021

21세기 노동자-관객

우리가 모르는 관객들로부터




21세기 노동자-관객

: 우리가 모르는 관객들로부터



주문을 했지만 피자는 도착하지 않았어. 나는 문자를 받았어. 폭설로 인한 사고 위험으로 일부 지역의 배달을 중단합니다. 서울 어딘가에 있었을 너는 어땠니? 너도 고객센터를 통과한 거절 문자를 보냈겠지. 아니, 너는 애초에 너의 원룸 빌라로 이른 퇴근을 재촉했을지도 몰라. 너라면 충분히 알았을 테니까. 이 눈을. 주문을 받을 수 없을 것을. 그리고 생각했지, 얼마를 포기해야 할 것인가. 안전을 위한 비용으로서 포기하게 될 오늘의 배달료.


*


너는 일기예보를 열라 열심히 챙겨봐. 내내 밖에서 일하는 너에게 날씨는 아주 중요하니까.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선선한 봄,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했지. 피시방이나 편의점 앞 테이블이 너의 대기 공간. 피시방에서 라면을 먹고 나와서 편의점 커피를 한 잔 먹고 달리던 길이었어. 베트남 쌀국수집에서 봉지에 담긴 음식을 픽업해서 나오는데 사장님이 큰 소리로 인사를 해주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까. 아무튼 아이고 좋다, 혼잣말했어. 떨어진 벚꽃이 수북한 길을 가로질러, 전염병 어쩌고 하지만 어떻게든 잘 살자고 생각했지.


그리고 너는 여름에 깨달았어. 날씨가 좋은 날 더 많이 달려야 했다. 날이 좋다고 한가해질 수가 없다. 너는 무겁게 출렁이는 장마 때문에 며칠을 날렸었잖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비. 그걸 입고 아파트에 들어설 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의 눈초리가 기억나. 악의는 없었지만 그들도 모르게 거둘 수 없는 시선을 떠올려. 너는 비가 와도 대기할 곳이 없지. 카페나 편의점은, 이 전염병의 시대에 의자를 놓을 수 없게 되었고. 피시방도 불안해. 너는 내내 바깥에 있어. 생각해봐, 어디에 있을 수 있겠어? 그러다가 생각한 거지. 날씨가 좋으면 더 많이 일하자고. 이런 허름한 날씨는 너에게 너무 위험하다고. 중고로 마련한 오토바이는 애초에 너무 늙은 아이였어. 비나 눈이 많이 예고된 날에는 대비가 필요하지. 너도 그 늙은 아이도.


그 날은, 아주 화창했어. 드높은 가을 하늘이 시퍼렇고. 크고 통통한 흰 구름. 날씨가 근사했지. 나는 하루 전날 배달 앱으로 샌드위치 35개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20잔, 따뜻한 아메리카노 15잔, 작은 쿠키 40모둠을 예약했었어. 사장님은 서비스로 더해진 자몽에이드 5잔을 추가로 보냈다고 하셨어. 오토바이 뒷좌석의 네모 상자 안에는 다 담을 수 없는 부피였잖아. 그래도 너는 그 콜을 수락했어. 상자는 가득 찼고, 양 손잡이에 작은 봉지를 하나씩 걸었고, 발을 둘 자리에 상자를 놓고 달려왔어. OO아트센터 지하 2층 연습실로 갖다 달라고 했는데, 내게 전화를 걸어 지금 극장 앞이라고 했지. 짐 나르는 게 귀찮아서 배달을 시킨 건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드넓은 로비를 가로질러 다시 앞마당을 가로질러 대로까지 나가야 했어. 너는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길을 찾지 못하고 대로의 건널목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있었어. 헬멧을 벗고 있던 너는 가까이 다가오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극장을 쳐다보고 있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 달려 있던 거창한 현수막을 보고 있었던 거구나.


        ㅡ 주차장으로 들어오셔서 바로 엘리베이터 타시면 되는데…

        ㅡ 아 제가 극장은 처음이라…


극장에 배달을 처음 왔다는 건지, 극장에 오는 거 자체가 처음이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 알 수 없었다기보다 그냥 흘려들은 거지, 내가. 나는 그날 연습 후에 이어질 저녁 세미나까지 준비해야 했어. 세미나용 케이터링을 맡은 김에 연습용 식사까지 주문했지. 카페 사장님은 조금 보탬이 될 매출 때문에 들뜬 목소리였는데 배달 기사 생각은 미처 못했어. 왜 너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나.


        ㅡ 뭐.. 배우분들이신가 봐요?


예의 지나가는 말처럼 들려서, 나는 아 그런 건 아니고, 라며 대충 답했어. 음료와 샌드위치 상자를 옮겨두고 가방에서 신용카드를 찾는 사이, 나는 네가 문 옆에 꽂힌 리플렛 더미를 뒤적이는 걸 봤어. 그걸 살짝 살피더니 주머니에 욱여넣는 것도. 너의 휴대전화에 연결한 간이 카드 단말기는 거래 승인까지 조금 시간이 오래 걸렸어. 나는 왜 그랬을까? 그냥 얘기해주고 싶었어. 네가 구겨 넣은 리플렛에 대한 추가 정보 말이야. 어쩌면 기획의도나 공연 설명보다 너에게 더 필요할지 모르는 정보.


        ㅡ 내일 저녁에 여기서 하는 그 공연. 자리 많이 남았대요, 구민 대상으로 하는 무료 공연인데.


*

  

일기예보를 챙겨보지 않으니까, 나는, 몰랐어. 눈보라가 치고 있는 줄, 빙판길에서 사고가 이어진 줄. 물론 이런 날 배달 주문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 배달을 거절해줘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커튼을 젖히고서야 안도했지. 종일 집에서 떠날 모르는 나는 눈이 오는 줄도 몰랐어. 그에 비해 너는 내달리지. 홍길동처럼. 여기서 저기로. 불쑥. 너는 매일 자신에게 출근해. 너는 1인 자영업자고 또는 프리랜서, 또는 특수고용직 근로자야. 21세기의 노동자. 우리들의 노동시간은 제각각이지. 원할 때 일하고 돈을 번다. 참 쉽지, 말이라는 거. 그리고 다들 알고 있지, 그게 대부분 거짓이라는 거.


너의 첫 배달은 보통 아침 10시야. 마지막 배달은 11시쯤이지. 체력이 따라주는 한 끝까지 일해. 너는 돈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이 일은 소중하지. 점심 배달은 2시부터 줄어들기 시작하지만 그나마 틈이 나는 건 3시 정도야. 저녁 배달이 시작되면 정말 끝없이 이어져. 어느 사무실로, 가게로, 빌라로, 오피스텔로, 아파트로. 저녁 시간에 배달 물량이 늘어나면 기본 배달료에 추가 할증이 붙어. 두 배나 세 배로. 너는 그 시간을 놓칠 수가 없지. 6시, 7시, 8시, 9시, 10시.. 11시쯤 치킨이나 떡볶이 배달을 마지막으로 하고 무거워진 몸을 원룸에 눕히지.


나 같은 사람에 애매하게 4시나 4시 30분쯤 도착하게 해달라고 하면, 너의 중간 휴식 시간은 훌훌 날아가지. 너는 네가 선택했으니까 괜찮다고 해. 그 콜을 받지 않아도 괜찮지만 받은 건 너의 선택이었다고. 날이 화창했으니까. 비가 오는 날에 줄어들 일에 대비해야 하니까.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하니까. 하지만 그건 희미한 착취야. 너도 사실 알고 있어. 네가 선택한 것 같지만 실은 날씨가 택했다는 거. 너의 노동시간은 네가 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잖아. 그건 구름과 굵은 빗줄기와 우비를 파고드는 바람이 정하지. 이제는 두꺼운 빙판길과 눈보라와 영하 14도의 온도가 정하지.


*


시원한 가을의 오후, 8시, 9시, 10시, 너는 따따블이 된 배달료를 쫓아 바쁘게 보냈지. 누구도 강제한 적 없이, 네가 선택했지, 이번에도. 무료 공연을 하는 극장을 지나쳐 어느 사무실로, 가게로, 빌라로, 오피스텔로, 아파트로 달려갔어. 돈가스, 볶음면, 떡볶이와 튀김, 돈부리, 초밥 세트, 족발, 추어탕, 김밥, 국수, 부대찌개, 생선구이, 찜닭을 실어 날랐어. 네가 움직일 때마다 주머니에서 삐죽거리는 공연 리플렛이 보여. 그 음악극 공연은 아주 캐주얼한 기획이래. 극장 기획팀에 따르면 아주 대중적이라, 누구든 즐길 수 있는 구성이라고 하더라고. 편하게 즐길 수 있으니까, 무료 공연이니까, 힘든 시기니까, 가능한 많은 사람이 올 수 있도록 공연 일시를 고민하다가 금요일 저녁 8시로 정했지. 다음 날 출근에 대한 부담이 없이, 퇴근 후 연인과 가족과 함께 찾아와 볼 수 있도록. 다른 공연들이 다들 그렇듯이, 저녁 8시 공연 시작. 30분 전 하우스 오픈.


그렇게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었을까? 더 다양한 관객을 만날 수는 없었을 텐데?최선인 거 맞지? 8시 공연 말이야.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어떤 관객들은 손쉽게 배제되는 거 말이야. 그냥 날씨가 좋은 날에 더 많이 달려야 할까, 태풍예보가 있는 날에는 극장에 갈 수 있도록.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겨울이 와버렸어. 너는 아직 극장에 도착하지 못했고.



2021년 1월 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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