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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Jan 16. 2021

진정성 퍼포먼스 Ⅱ

피켓라인


1.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광장은 자주 통제되었다. 집회와 크리스마스이브가 겹친 토요일에는 산타 복장을 하고 촛불을 든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다. 기쁘다 탄핵 오셨네, 하며 캐럴 가사를 구호로 바꿔 불렀다. 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인사는 하야 크리스마스,라고 바꿔 외쳤다.


보신각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카운트다운을 외친 후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주고받는데, 그 사이로 박근혜 퇴진이나 구속을 외치는 소리가 신나게 끼어들었다. 영하 10도의 강추위에도 사람들은 모였다. 건전지로 밝히는 플라스틱 촛불은 웬만해서는 꺼지지 않았다.


길은 봄이 올 때까지 반짝였다. 그 빛, 반짝임은 좋은 연대였다. 공공의 적을 향해 함께 악을 썼고 그 덕분에 모두가 같은 자리에 한쪽으로 서 있던 겨울. 새로운 페이지를 펼치는 기분이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예외는 없는 것 같았다.



2.

기괴한 2020년. 그리고 2021년. 캐럴은 거실에서 듣는다. 선물은 택배로 도착했다. 보신각 앞은 비었다. 새해인사는 줌으러 했다. 5인 이상 집합 금지이다. 통금이 생겼다. 불가피한 일들. 온라인으로 많은 것이 옮겨졌고 현장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김용균의 어머니와 이한빛의 아버지를 비롯해 다섯 명은 지난 11일부터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단식농성을 했다.


그 현장에 직접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잘 알려진 정치인들. 그들은 자신들의 방문을 널리 널리 알렸고 그런 방문객 중에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 당시 후보자도 있었다. 새로운 페이지를 펼친 줄 알았는데 매번 찢겨나갔고, 그 와중에 변창흠 같은 자가 장관 후보자가 되었다. 그는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추위 속에 앉아 있던 다섯 명은 그에게 이 사과는 구의역 김 군의 유가족에게 해야 할 몫이란 것을 가르쳐줘야 했다. 단식 11일 차였다. 청문회를 앞두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진정성 퍼포먼스를 마친 변창흠 후보자는 기름진 밥을 먹었을 것이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찾아왔다. "지금 야당이 사실상 심사를 거부하는 상황이라 악조건"이라고 하며 "야당도 설득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했다. 김용균의 어머니는 "여태까지 (민주당이 원한 법안은) 여당이 다 통과시키지 않았느냐"라고 "많은 법을 통과시켰는데 왜 이 법은 꼭 야당이 있어야 하느냐"라고 반박했다. 단식 14일 차였다.


지명 철회 없이 청문회가 열렸다. 21대 국회가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을 회의 안건으로 올려 논의한 시간은 다 합해 2시간이 되지 않는다. 땅 위에 평화를 전한다는 성탄절, 단식은 15일째 이어졌다. 정부는 변창흠 국토부 장관 당시 후보자가 행한 사과의 진정성을 인정했다. 그는 국토부 장관이 되었다.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은 통과된 것일까. 단식은 29일째 이어져야 했다.



3.

둥글고 비스듬하게 난 길을 따라서 가는데, 거기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잘 아는 얼굴인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나를 반기며 말을 꺼냈다.


     ㅡ 혜령 씨 작업은 조금만 더 나가면 좋을 텐데 힘이 좀 아쉬워요.


칭찬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아쉽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괜찮은 척, 아, 좀 그렇죠, 받아쳤다. 좀 그렇죠 라니... 그런 말은 차라리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


     ㅡ 현장에 있는 퍼포먼스들이 있잖아요, 시위에는 이미. 그 현장성이 빠진다는 게...


나도, 모든 걸 다 마친 후에는, 현장에 있는 이들에 대한 경외감에 대해 말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현장에 있다면 그 바깥에 있는 사람도 있다. 적극적으로 시위의 피로와 고통을 감내하며 현장에 나가는 사람이 보기에 나의 작업은 나이브하게 보일 수 있다. 나의 의도는 “나이브하게 보임”으로 드러나는 진정성 의심을 뒤집는 데 있었는데, 아아, 그의 피드백은 일종의 실패 선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진정성이 부족한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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