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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Jan 16. 2021

진정성 퍼포먼스 Ⅲ

피켓라인


날이 좋은 구월에 오르막길을 걸었다. 한 손으로 유모차에 타지 않겠다는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유모차를 잡고 걸어 올랐다. 잠시 후면 축제 리플릿에서 본 공연이 광장 귀퉁이에서 시작될 예정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아이가 아니라 내 몸과 마음에 좋을 움직임과 목소리를 보고 들을 참이었다. 아마도 그 풍경이 아이에게도 재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바람도 햇살도 좋은 가을에는 탁 트인 곳을 찾아 꽤 많은 축제가 벌어졌다. 한때는 축제 관련 일을 한 적도 있었고 내가 만든 공연으로 참여한 적도 있었지만, 아이가 세 살이 되어서야 나는 겨우 그 축제에 관객 되기를 시도해볼 수 있었다.     

 

이 공연을 보러 온 것은 온전히 나의 의지였다. 아이와 함께는 극장은 물론이고 단골이던 한옥 카페도 가기 벅차지만, 이건 거리예술축제다. 우리는 거리예술축제가 누구에게나 열린 곳에서 함께할 수 있도록 기획된 장이란 걸 안다. 여기라면 근사한 걸 조금이나마 편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든든했다.   

  

바닥에는 자리를 잡고 앉도록 친절한 방석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퍼포머가 앞에 등장하자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싹 가시고 조용해진다. 바람이 나무에 스치는 소리와 음악 한두 줄기가 흘러들었다.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장면에서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일어나 무대로 합의된 너른 앞 공간으로 나갔다. 공연이 조금씩 진지해지는데 그때 아이가 일어났다. 뭐라고 큰 소리로 나에게 얘기도 했고 사람들이 서 있는 앞쪽으로 나가려고도 했다. 한창 진행 중인 공연에 방해가 될 것이 뻔했다. 뒤에 앉은 여자가 작은 캐릭터 볼펜을 주며 아이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고마운 일이지만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나는 더 버텨볼까 고민할 틈도 없이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끌며 뒤로 크게 돌아 공연 장소인 거리를 벗어나야 했다. 다양한 형태의 상호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숙한 관객이라는 규칙은 극장만이 아니라 거리에서도 기본값이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하는 동안에 나는 그 기본을 지킬 수가 없다. 거리가 내게 멀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임신과 시기를 같이하는데 아이를 데리고 온 축제의 한 구석에서 그 막연한 느낌은 확실해졌다. 


광장과 거리는 어쩌면 모두를 위한 곳이 아니구나.      


피켓라인이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거리에 나서는 일에 대한 개인적인 혼란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2016년 광화문에서 토요일마다 시위가 벌어질 때 나는 그것을 대부분 TV로 봤고, 축제를 찾았던 그 날의 기분을 그 토요일마다 느꼈다. 시위는 매주 있지만 나는 임신과 일과 그밖에 다른 갖가지 이유들로 시위에 매번 나가기 힘들었다. 미안함과 부채감, 소외감 같은 것들이 답 없이 뒤섞였다. 촛불과 피켓으로 채워진 광화문은 거리라는 장소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주고 있었는데, 나는 그 모두가 되지도 하나가 되지도 못했다. 의지와 달리 거리로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실제 현장에 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어떤 주장의 진정성이 의심받아야 할까 라는 질문, 그럼에도 거리로 나서 외치는 주장의 무게에 대한 탐색의 방식으로 피켓 인형들의 대리 시위는 기획되었다. 2016년 광화문에서의 집회가 보여준 촛불이라는 시위 언어만이 아니라 1912년 빵과 장미에 비유한 구호를 내걸었던 매사추세츠에서의 구호, 그리고 2012년 러시아 바르나울에서의 시위하는 인형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2018년에는 문래동에 200여 개의 초소형 피켓 시위대를 골목 곳곳에 세웠다. <피켓라인> 연작의 첫 작업이었다. 시민 워크숍과 공모를 통해 수집한 구호로 피켓을 만들었고 5cm~10cm 정도의 작은 인형들은 피켓을 들었다. 누군가를 대신해 꼭 해야 할 말들을 찾아 모았다. 참가자들이 외치고 싶다고 쓴 구호부터 언론에 보도된 실제 시위 현장 사진 속 구호들, “We want bread but ________ too”라는 빈칸 구호가 활용되었다. 일부에게 집중된 발언권을 분배하고 적극적 발화로서 시위가 갖는 상징을 ‘분신’들과 나눠 갖는 과정에서 주장의 적극성과 진정성의 연결에 관해 묻고자 했다. 


그러다가 2020년이 왔다. 


극장과 달리 거리는 모두를 위한 공간이라는 믿음이 틀렸다는 걸 알았는데, 그래서 거리로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거리와 광장에 모일 수 없는 2020년. 코로나19의 시대, 사람을 대신해 분신을 내보낼 수밖에 없는 시대 말이다. 이 재난 상황에서 대리 시위는 모두에게 유효했다. 어쩌면 첫해보다 더 많은 인형을, 더 많은 구호를 담아 세우는 게 적절해 보였다. 하지만 그 ‘모두’가 아니라 코로나19라는 재난 이전부터 재난과 다를 바 없는 조건에서 살아온 인물들과 집중적으로 대화하기로 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동과 대면에 어려움이 있었던 사람들 말이다. 그야말로 ‘모두’가 비대면과 거리 두기, 자가 격리의 피로감을 호소하며 다시 과거의 ‘일상’을 되찾기를 기원하는 사이, 바로 그 비대면과 거리 두기, 자가 격리가 코로나 이전부터 일상이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게 잊힐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재난 이전에도 이미 재난인 삶을 자꾸만 목격했다. 


출산과 육아로 집에 묶인 부모, 야간 노동과 주말 노동으로 쉬지 못하는 노동자, 이동이 어려운 환자나 장애인, 그리고 그들의 보호자와 간병인, 새벽부터 밤까지 가게를 지켜야 하는 자영업자 등은 지금의 재난 상황이 초래한 불편을 이미 오랫동안 겪어왔다. 그들의 불편이 코로나19로 인해 더 복잡하고 절박해졌으니 그냥 그나마 나았던 과거의 정상성을 되찾으면 될까? 대답은 ‘아니오’ 여야 한다. 비루한 과거의 정상성으로 돌아가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매일 배우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기존의 정상성 범주가 탈락시켰던 일상에 주목할 때 재난 이후를 조금이나마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거리예술과 축제라는 상황에서 그들이 겪었을 법한 일들을 짐작하며 질문을 골랐다.      


 “무리 지어 선 거리예술의 관객들 사이에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은 관객의 자리도 있나?”

 “공연 시간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어른용 공연과 아이용 공연은 따로 있나?”

 - “(아동용이 아닌) 공연을 보는 거리의 꼬마 관객들은 조용히 해야 할까?”

 “거리 공연과 극장 공연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있나? 오히려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리-광장은 모두를 위한 공간인가? 그 ‘모두’에 빠진 사람은 누구인가?”      


첫 인터뷰이였던 김선옥 님은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이다. 그녀는 일주일에 하루만 쉰다. 몸이 불편한 환자를 돌보기 때문에 밥도 환자 옆에서 먹고 잠도 환자 옆에서 잔다. 혼자 쉬는 시간은 환자가 물리치료실에서 치료를 받는 20분이 전부다. 25년간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여행은 딱 한 번 가봤다. 딸네 가족과 보내는 3박 4일을 위해 환자와 보호자를 한참 설득해야 했다.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그 환자의 특성과 병을 잘 이해해야 가능한 것이어서 익숙해지는 데에 시간이 걸리니 예민한 환자의 경우 대타를 구하기 힘든 직업이었다. 거리예술축제에 가본 적이 있으시냐는 질문을 꺼내지도 못했다. 두 번째로 통화한 김민정 님은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가게를 엄마와 함께 운영하는 자영업자다. 그녀가 사는 지역에는 거리예술축제가 없고 서울에서 한다는 거리예술축제는 페이스북을 통해 사진과 짧은 영상으로 접했다. 인터뷰 중에 서울의 거리만 거리냐고 웃으며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게 웃기지 않았다. 거기에 대고 예산이나  세 번째로 이야기를 나눈 노재옥 님은 휠체어를 타고 공연을 보기에 휠체어석이 잘 마련된 요즘 극장처럼 좋은 곳이 없다고 하셨다. 큰 규모의 거리 공연은 멀리서도 잘 보이겠지만 작은 공연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거리 공연이나 축제에서는 화장실 찾기가 힘든 게 가장 부담이라고 하셨다. 시야와 자리만 확보된다고 끝이 아니다. 거리는 모두를 위한 곳이 맞나? 네 번째 인터뷰이는 나 자신이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 주차 공간이 협소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세요, 라는 말이 얼마나 야속한지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나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고 자동차 사용은 줄여야 하고 주차장은 없애고 차라리 그 자리가 공원으로 바뀌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카시트에 두 아이를 앉히고 유모차와 가방을 싣어야만 겨우 출발할 수 있게 된 지금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대중교통 이용이 모두에게 정답은 아니다. 나는 아이들을 맡길 사람이 없는 한 축제에 갈 수 없을까?     

 

어쩐지 질문은 더 많아졌다. 그렇지만 대리 시위는 미뤄지고 인형들은 광장에 서지 못했다. 작고 조금 이상하고 가볍고 연약한 인형들이 단단하고 멋지고 큰 것들로 채워진 도심에 귀여운 균열을 내어주길 바랐고 못생긴 이상함이 얼마나 힘이 센지 얘기 나누는 모습을 상상했으나 아직 광장은 비어있다. 비와 바람을 맞거나 10월 햇살에 누렇게 변하라고 고른 흰 광목 원단으로 만든 인형은 창고에 하얗게 누워있다. 축제는 취소되었고 지금 축제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은 모두가 힘드니까 이대로 내년을 기약하면 될까? 자꾸만 질문이 늘어나는데 답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시대다.          







*이 글은 서울거리예술축제2020 아카이빙북 [실현하지 못한 아이디어, 다음을 위한 기록]에 수록된 글입니다. 축제 웹사이트(http://ssaf.or.kr/community/data#)에서 PDF버전의 책 전체를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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