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생각의 기원을 찾아서
이것은 무려 13년전의 일이다. 2006년,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니까. 독일 뮌헨에서 사나흘 정도 머무르는 일정이라 가까운 도시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했다. 어디가 괜찮은지 찾아보니 ‘하이델베르크’ 라는 도시가 있었다. 고성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볼 것이 너무 많거나 도시가 너무 넓지 않아 하루만에 다녀오기 적합한 장소라는 추천이 있었다. 아마, 있었을 것이다. 그 때는 스마트폰이 없었고, 나는 커다란 유럽여행책을 가지고 다녔으며, 한 도시를 클리어할 때마다 책에서 그 도시를 나라를 찢어서 버렸으니까. 크. 이 낭만하고는.
하이델베르크는 실로 작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고고함이 느껴지는 고성을 향해 걷고 걸어서 구경도 다하고 나니, 밥으로 허기짐을 채우고 나니 할 게 없었다. 이렇게 작고 할 게 없는 곳이었다니! 어쩐지 그 무거운 여행책에 한두페이지로 설명이 끝나더라. 아오. 낭만은 무슨 낭만이야. 스마트폰이 최고지!! 라고 생각하기엔 스마트폰이란 게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몰랐을 시절이니까. 고민했다. 무엇을 해야할까.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가는 기차를 탈까.
그때 찾은 게 ‘철학자의 길’이다. 아. 철학자의 길이라니. 이름부터 멋지지 않은가. 크. 뭔가 여기를 걸으면 막 현자가 될 거 같고. 실제로 하이델베르크에 살았던 헤겔, 괴테, 아스파스 등이 이 길을 걸어다녔다고 하니까. 나의 동반자, 여행책에도 분명 추천이 있었다. 있었을 거다. 하이델베르크엔 다른 뭐가 없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허세병 초기(아니 중기)가 있던지라 뭔가 지나칠 수 없는 이끌림에, 호기심에 발걸음은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점심도 든든하게 먹었겠다 그럼 한 번 21세기의 철학자가 되어볼까.
이게 철학자의 길....이라고?
와씨. 에밀 졸라 힘들었다.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가의 이름을 이렇게 사용해서 죄송하지만, 이런 건 진짜 찰진 욕을 하면서 해야 맛이 사니까. 처음엔, 그랬다. 오, 뭔가 호젓해. 뭔가 어두운 골목길이 뭔가 뭐랄까, 느낌 있어. 그러나 곧, 내 시야에는 괜히 같이 가자고해서 날 따라온 앞사람의 종아리만 신발만 보였다. 꽤 언덕길이라는 이야기다. 다리도 아프고 땀도 나고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철학자? 철학? 아 뭔 생각이 날 기운이 나야 하지.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데. 내려가기엔 너무 많이 올라오고 계속 올라가기엔 힘들어서 짜증만 나는구만. 그 망할 놈의 여행책. 이게 다 그 놈들 때문이야. 아니 그 뭐야 헤겔 그런 사람들은 여기서 뭔 생각을 했다냐. 이거 올라가면서 사색을 할 정도면 최소 엄홍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냐.
아. 이 힘든 길을 다 오르고 나면, 이래서 철학자의 길이구나- 는 개뿔. 언덕을 다 오르면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푸르딩딩한 철학자…아니 언덕 골목길을 다 걷고 나니 맞은편엔 아까 다녀온 고성이, 하이델베르크의 전경이 보였다. 그랬다. 그게 뭐! 그게 뭐라고! 걷는 도중엔 힘들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거, 인정. 그러면 이 길 끝엔 뭔가 탁! 하고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뭐, 그런 거 없어? 없어?? 없었다. 속았다 싶었다. 올라가는 도중에도 속았다 싶었고 다 올라와서도 속았다 싶었다. 내가 그 여행책 무슨 여행책이었는지 다시 기억해내고야 만다.
좋은 기억이 많다. 첫 유럽, 첫 배낭여행인데. 13년 전의 여행이라도 브뤼셀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커플도 파리의 기분 좋은 낯설음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따뜻함도 다 떠올릴 수 있다. 지긋지긋한 여행책을 들고선 지도를 따라 걸었기에, 몇 년이 지나 프라하에 갔을 때 거의 모든 길이 익숙할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중한 여행에서 이 알싸한 기억을 이제서야 다시 떠올리는 건, 멈추고 싶기 때문이다. TMI(Too Much Information)보다 심각한 TMT(Too Much Thinking)랄까. 철학자의 길에 대한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햇빛이 다 들어오지 않았던 어두운 푸른색의 골목길에서 매우 힘들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이제야, 그들도 무언가를 멈추고 싶어서 그 길을 걸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무언가를 바라고, 해답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멈추고 싶어서. 그래야 선명해지는 것만 남으니까. 기억을 떠올려보면 철학자의 길에는, 이 길에서 생각했다. 떠올렸다는 말이 없다. 그저 걸었다는 말 뿐.
대답하지 않는 모든 것이 대답이듯이, 생각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생각이 된다.
2018.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