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처음으로, 쓴다.
지난 주말엔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러 다녀왔다. 근 한 달만에 찾아뵙는 거였다. 나의 성질이 게으르고 무심하며, 나의 삶이 고달픈 탓이었다. 전화 한 통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내게 가장 힘이 되는 사람은 때론 가장 나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내겐, 그러하다. 그래서 할머니의 목소리를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겨울이 되면 귤이 나온다. 밤이 되면 어둡다와 같은 말이다. 그만큼 당연하다는 뜻이다. 겨울 과일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귤이니까. 천방지축 어렸을 때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꼼지락 꼼지락 쉼 없이 까먹어서 손과 발이 노오랗게 변하곤 했다. 그만큼 귤을 좋아한 탓에 엄마는, 하루에 두 개만 먹는 걸로 제한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다 피하는 방법이 있었다. 귤이 가득 담긴 검은 봉지를 들고 안방으로 가는 거다. 그리고 할머니 앞에 앉는다.
“할머니, 저랑 내기해요. 누가 더 맛있는 귤 고르나.” 할머니와 손주는 검은 봉지에 손을 집어 넣고 만지작 만지작 귤을 고른다. 마술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처럼, 복권 방송에 숫자를 고르는 것처럼. 손의 촉감을 동원해 맛있는 귤을 판별한다. 껍질이 얇고 적당히 말랑말랑하며 ‘꼬다리’가 싱싱한 녀석. 찾았다. 잽싸게 꺼내서 껍질을 벗긴다. 한입 맛을 보고 기다린다. 두구두구두구. “이번에도 정우 귤이 더 맛있네.” 손주는 더 새콤하고 더 달콤한 귤을 나눠 할머니 입에 넣어 드리고선 나머지를 호로록 먹어 치운다. 그리고 벌써, 손은 검정 봉지로 들어가 다음 귤을 고른다.
할머니는 그렇게, 내게 가장 친한 친구였다. 할아버지는 좀 무서웠기 때문이다. 군인 출신이셨던 할아버지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정릉에서 태릉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시기도 했다.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너무 딱딱해서 불편할 정도였으니까. 그에 비해 할머니는,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살을 맞대고 보낸 사람이었다. 집안일로 정신 없던 엄마와 학교에 가서 늦게 돌아오는 누나는 나와 놀시간이 없어보였으니. 손대면 톡하고 현철의 노래를 함께 따라부르고, 유명우의 복싱 경기를 보면 원투원투를 투닥거리고, 아버지가 보드게임을 사다주시면 첫 번째 대전 상대가 되어주는 사람. 그렇게 하루의 꽤 많은 시간을 할머니와 함께 보냈다. 할머니의 손등을 꼬집으면 주름이 다시 금방 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그러니 귤을 골라도, 흘러간 트로트를 들어도, 무슨 어떤 게임을 해도 문득문득 할머니가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저녁 밥상에 배우자님이 꽃게가 들어간 된장찌개를 끓여줘도 “아. 옛날엔 할머니가 꽃게 살을 다 발라주셨는데”라는 세상 쓸모없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도 사실이 되는 거다. 어쩔 수가 없다. 할머니는 그만큼 내 몸 어딘가에 아주 많이 남아있다. 물론 그 다음엔, 내가 꽃게의 살을 바르고 있다는 게 다르지만. 그렇게 누군가에게 꽃게의 살을 내어주며 그게 얼마나 비리고 귀찮은 일인지를 깨닫고, 그게 얼마나 평범하고 그저 그냥 당연한 사랑이었는지를 깨닫는다. 할머니가 내게 주신 그 사랑이.
혼자서 살던 서른 즈음엔, 출근을 하기가 싫으면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정우예요. 응, 정우구나. 그리고 몇마디 안부를 주고 받고 나면 꼭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우리 손주들은 그래도 취직을 바로바로 잘해서 참 좋다고. 요새 일자리 구하는 게 그렇게 힘들다는데 새별이랑 정우는 그래도 떡하니 취직해서 좋다고. 출근길에 그런 말을 들으면, 아무리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발이 저절로 움직여지게 된다. 그 핑계로 할머니 목소리를 듣는거다. 그게 좋았다. 2016년 1월 이전까진. 그 겨울 카타르로 출장을 다녀온 사이에, 산책을 나가셨던 할머니에게 뇌출혈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집에 오자마자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던 그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어떤 무언가에 화를 내고 싶던 기분. 그리고 그 이후론 할머니의 손주 취직 자랑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아픈 할머니 중에 가장 건강한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였다. 퇴원을 하는 날에도 병동에 수많은 할머니와 간병인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나온 분이, 우리 할머니였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것이 그대로여서 다행인데, 그래도 그래서 슬프다. 할머니를 마주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라서. 할머니의 얼굴을 보면 할머니의 손을 잡으면 왈칵하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내가 고달플 때엔 할머니에게 위로를 기쁨을 드릴 수가 없으니까. 점점 더 외면하고 싶어지는 거다. 할머니의 온기에서 위안을 응석을 부리고 싶은 건 여전한데.
나의, 할머니.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아버지 옆에만 붙어있는 나를, 할머니는 부른다. 할머니 옆에 손주는 앉아서 마냥 손만 쓰다듬는다. 꼬집지 않아도 생기는 손등의 주름을 만지작 거린다. 다시 좋지 않은 상태가 되어 어눌한 발음이 된다고, 이전보다 정말 어눌한 발음으로 한글자 한글자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또렷한 마음을 듣는다. 그래서, 쓴다. 토해내듯 뱉어낸다. 할머니가 아프다고 쓰면 할머니가 정말 아픈 사람이 될까봐 무서워서 말 한마디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좀 더 또렷하게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조금은 두서 없어도 괜찮으니까. 종종 기록하고 기억해야겠다. 나의 할머니를.
2018.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