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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loco Feb 08. 2019

다시, 새해

구정 지나면, 진짜 새해죠.


설날이 지났다. 구정. 민족의 대명절, 은 모르겠고 돈을 받아서 가장 좋았던 명절. 가끔 생일이랑 겹쳐서 축하도 못 받고, 선물이랑 세뱃돈이랑 퉁쳐서 속상했던 명절. 차례를 지내고 떡국 한 그릇씩 먹고선 아이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머털도사’를 봤던 명절. 슥슥슥 채널 돌리다가 할 게 너무 없어서 결국엔 윷놀이 한 판 했던 명절.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연락을 신정에 했는데 이번에도 해야 하나 고민되는 그, 명절.     


대략 한 달 정도가 지났다는 뜻이다. 새해, 새 나이, 새 다짐을 맞이한지도. 12월 31일에서 1월 1일이 된다고, 서른세 살에서 서른네 살이 되었다고 내 몸과 마음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나이는 자꾸만 든다. 그게 서럽거나 불편하거나 한 일은 아니다. 아직은. 그래, 아직은. 특별하게 실감이 나는 일도 없고. 아, 맞다. 문자 인증받으려 할 때 출생연도를 자꾸 점점 많이 내려서 찾아야 한다는 것 말고. 그게 뭐 서운한 일은 아니니까. 아니야. 아니라고.     


좋겠다 멍뭉이야. 넌 나이 먹으면서 다리만 길어지는구나.



다짐도 줄었다. 예전에는 지키든 말든 새해 계획을 세우는 게 좋았는데. 설레는 일이었는데. 올해를 만나기 전에도 분명히, 했다. 1월 1일에 막 고민하는 건 좀 촌스러우니까, 그것도 일주일 먼저 크리스마스 기간에. 늘 그러했듯이 다이어리 뒤편에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는데, 시작했는데, 시작했는데! 특별하게 뭘 끼적일 게 없는 거다. 영어 공부는 됐고, 건강이야 당연하게 건강해야 하고, 뭐 어디 여행은 돈이 있으면 가는 거고, 뭐, 뭘 다짐해야 하는 거지? 뭣을 적어야 하는 거야! 그러다가 아, 어느새 무언가를 고민하고, 꿈을 꾸고, 하고 싶은 그런 게 점점 줄어드는 나이가 된 건가.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큰 걱정 없이 잘 살고 있어서. 그래서 그런 건가. 그러기엔 좀 사고뭉치라 늘 문제는 있기 마련....


그리하여 편애를 늘리기로 했다. 다짐이라고 하면 다짐이랄까. 원래 박애주의자는 아니니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연수 님이 그러했다. 모든 걸 미적지근하게 좋아하느니 차라리 편애하고, 하나 둘 늘려가도록 하자고. 그래 어차피 뭐 하고 싶고 달성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2019 올해의 키워드로는 편애의 확장. 당첨. 땅땅땅.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확실한 사람이라. 편애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게 더 많은 사람이라. 한 번 사는 인생 좋아하는 것만 하고 지내도 모자랄 시간이라지만, 싫어하는 것들이 줄어들었을 때 조금 더 유쾌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에서. 그동안 싫어했던 것들을 차근차근 하나씩 해보자 라고. 삐죽삐죽, 나도 모르게 나와있던 마음의 날카로움을 조금 더 무디게 그리고 둥글둥글하게 만들 겸.

마음의 평화, 는 맛있는 음식에서 오는 법.



그래서 설엔, 굴을 먹었다. 내가 거의 유일하게 자의로든 타의로든 안 먹는 음식이 굴이기 때문이다. 생으로든 무침으로든 국으로든 밥으로든 전으로든 다, 다 싫어! 그게 맛이 문제냐 식감의 문제냐 이 좋은 걸 왜 안 먹냐라고 묻는다면, 슬픈 사연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야흐로 국민학생 시절. 그러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즐겨보았던 스브스 인기가요와 관련이 있다. TV 시청을 제한했던 집에 태어난 불쌍한 남매는 인기가요 시청을 위해 아버지와 딜을 하였는데. 굴을 좋아하는 아버지께선 이걸 먹어야 건강해진다며 1인당 2개씩 먹으면 인기가요를 보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하셨던 거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아니 굴 먹기를 해야 해서, 그래서. 그래서!! 그 이후론 굴을 쳐다보는 것도 싫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여러분, 건강한 식습관은 알아서 기르는 겁니다. 네?


하지만, 처가는 설날에 굴 떡국을 먹었으니. 두둥. 예전에도 하동 처가에서 굴 떡국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땐 장모님께서 사랑하는 사위를 배려해주셔서 굴을 모조리 덜어주셨는데. 하지만 국물도 싫....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밥 말아서 꿀떡꿀떡. 그 기억을 살려 이번 설에는 처가에서 굴 떡국을 먹겠다! 당당하게 먹겠다! 다짐한 것이었다. KTX에서부터 생각했다. 굴을 먹겠다. 먹으리라. 자발적 굴 섭취가 근 10년은 넘었으리라. 그러나 먹겠다. 두어 개는 먹겠다. 싫어하는 것을 줄이겠다. 하동 집에 통영 생굴 한 박스가 선물로 들어왔을 줄은 몰랐다. 굴 떡국에 굴이 떡만큼 들어가 있었다. 나의 배우자님은 웃으며 덜어내라고 했다. 두어 개만 남기고 덜었다. 먹긴, 먹었다. 꿀떡꿀떡 말고 굴떡굴떡 삼켰다. 그렇게 싫어하는 것을 줄였다. 줄이리라. 근데 다음에 또 안 먹을 거 같은데.



설날이, 지났다. 다짐 같은 건 없어도 조금 더 자랄 순 있지 않을까. 굴 두어 개를 먹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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