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닝 2020을 샀다. 축구 게임 말이다.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하는 매우 아주 재미있는 게임. 2020이란 숫자를 보면 알겠지만, 이 친절한 게임은 유럽 축구의 새로운 시즌에 맞춰서 업데이트된 버전을 내보낸다. 그러니까 이전까지 우리 집에 있던 건 ‘위닝 2019’이었고 나는 그걸 틈틈이, 시간이 될 날 때, 겨우, 힘들게 했다-라고 하기엔 사실 좀 많이 했다. 배우자님의 눈치를 보고 적당히 협상하며 말이다. 엄마랑도 게임 시간을 가지고 거래한 적이 없었는데. 일을 시작하고 보니 어렸을 땐 몰랐던, 아무 생각 없이 게임하는 즐거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임을 잘하려면 머리를 많이 써야 하긴 한데 그게 또…. 뭔가 좀 다르지 않습니까?
2049/50 시즌. 그리하여 새로운 버전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 팀에 감독이 되어서 진행하는 마스터리그를 2050이란 숫자가 보일 때까지 진행했다. 그렇게 하면 게임에서 손흥민 선수가 은퇴했다가 다시 나와서 또 은퇴했다가 또다시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feat. 윤종신 ‘환생’) 한 시즌을 온전히 다 끝내는데 보통 4시간 정도가 걸리니까, 30 시즌을 하려면 120시간…. 이걸 알게 되면 배우자님이 또 부글부글 할 텐데 어떡하지. 게임을 그렇게 하고 있을 때도 한 소리 듣긴 했다. “진짜 2050년에도 저렇게 게임하고 있을 거 같아서 화가 나.” 아니야, 2050년이면 환갑이 넘었고 그땐 나이가 너무 들어서……아들 딸이랑 같이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1997년. 처음, 위닝일레븐이란 게임을 했던 연도다. 그게 얼마나 먼 과거의 일이냐면 그때 게임에선 한국 대표팀 공격수에 황선홍이랑 최용수가 있었다. 우와. 그런 게임을 벌써 20년을 넘게 한 거다. 앞으로 30년도 문제 없… 다는 말은 넣어 두자. 여기까지 읽고 배우자님에게 전화를 받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데 왜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냐면 이것이 나의 첫 게임기이자 첫 게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처음은 기억이 선명해 잘 지워지지 않으니까. 1월, 겨울, 생일을 3일 앞두고 낯선 동네로 난생처음 이사를 했던 해였는데 그래서 그게 미안했는지 아빠는 내게 게임기 선물을 제안했다. 물론, 호락호락한 딜은 아니었다. 그럼 우리 아빤데. 생일과 어린이날 그리고 크리스마스까지 다 합쳐서 사주겠다! 이거 하나로 땡이다!! 대통합은 이런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만화책을 읽으라고 하면 했지 게임기는 말도 못 꺼낼 아빠였는데, 그런 아빠의 입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이라니. 너무 신난 마음으로 용산에 가서 비싸고 귀한 게임기를 사 온 기억이 난다.
1998년. 그렇다고 주구장창 위닝만 한 것도 아니었다. 컴퓨터로는 FIFA 시리즈가 있었으니까! 게임기는 하려면 TV에 설치해야 하는데 컴퓨터는 바로 할 수 있으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방에 하나, 엄마 아빠방에 하나 있는 TV에 눈치코치 보면서 하면 그것도 막 마음 불편하고. 금방 쫓겨날 거 같고. 그래서 그땐 두 가지 게임을 사이좋게, 했다. 엄마랑 사이는 점점 나빠졌지만. 그래서 이 게임은 어떻게 시작했냐 하면, 그땐 또 용산에서 ‘백업 CD’라는 걸 팔았다. 게임 몇 개를 공CD에다가 구워가지고 1만 원, 2만 원에. 용산 전자상가를 애들이랑 걸어 다니면 막 형들이 와서 “FIFA랑 NBA 백업 CD 살래?”라고 물어보고 졸졸 따라가서 CD사고 돈도 빼앗기고 몇 대 맞고 집에 와서 CD 넣어보면 막 이상한 거 들어있고 ….. 근데 그게 막 고맙고? (부끄…)
그래서 1998년 여름은, 이 노래였다. 둥탁둥둥탁탁둥탁-둥둥탁탁. 그리고 나오는 기타 소리. 그다음 워-호! FIFA98의 배경음악! Blur의 song 2. 듣기 좋든 싫든 들었다. 게임을 하려면 들어야지 별 수 있나. 네덜란드한테 다섯 골이나 먹힌 다음 날에도(내가 대신 이겨준다고), 호나우두가 지단한테 진 다음 날에도(축구는 브라질이니까). 무엇보다 이 노래는 인트로가 맛집이다. 모모랜드 ‘BAAM’의 인트로를 들었을 때도 나는 이게 Blur의 ‘Song 2’를 레퍼런스로 한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때는 정말 딱 시작 부분 듣자마자 ‘아 내가 이제 축구 게임 세계로 들어가는구나!’ 라며 가슴이 뛰었다. 내가 직접 공을 차고 뛰는 건 아니지만. 물론 나중엔, 이 두근두근도 너무 너무 너어어어무 많이 들어 인트로 시작하자마자 지겨워 스피커를 끄고 했지만. 절대 엄마 몰래 하느라 그런 건 아니고요.
지겹게 들었다. 게임은 게임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영화는 영화로. 글은 글로. 광고는 제품으로. 그러니까, 각각의 콘텐츠는 각각의 목적에 부합하는 행위를 지향해야 한다는 이야기. 일을 배우면서 하면서 충분히 들었다. 안다. 당연히 그렇게 고민한다.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도 좋고 기억에 남는 것도 좋은데, 원래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뭔데? 전달하려는 목적이 무엇인데 라는 생각 끝없이 하니까. 그런데, 좀 다른 걸로 기억하면 안 되나? 전달하는 사람의 목표,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환경이 경험이 시대가 시간이 기억이 다 다른 상태로 마주하는데. 단어 하나로 기억되는 글도 있고, 읽었을 때의 장소로 기억나는 글도 있고, 마주하며 들은 노래로 생각나는 글도 있고, 그게 영화도 미술도 게임도 음악도. 창작자 의지로 기억하게 되는 것 말고 오롯이 당신이 남길 무언가를 선택하는 거, 그거 하나라도 있다는 게 사실 더 중요한 거 아닌가. 뭐, 그래서 늘 내 영상이 삐뚤빼뚤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기억이 안 난다. 벌써 2019/20 시즌이 끝났는데 말이다. 나의 영웅 크루이프를 아스날 감독으로 앉혀서 성공적인 한 시즌을 보냈는데도. 내가. 게임을 하면서. 무슨 노래를 들었는지. 그 노래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구성이었는지. 요즘 게임에는 당연히 여러 곡이 랜덤으로 돌아가며 나오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배우자님도 한 마디 했다. 자기는 시험공부하고 있는데 옆에서 게임하고 있다며 툴툴 거리며 위닝은 노래가 별로인 거 같다고. 그래서 가끔은 무관중 경기로 한다. 소리를 다 끄거나 연주곡을 틀어놓기도 하면서. 그래도 괜찮았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가 아니라, 위닝 2020에는 Blur가 없고, Song2가 없기 때문에. 각성하라 코나미여. 자고로 배우자님 말씀엔 틀린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