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주 5일. 날 닮은 너. 너를 닮은 나.

아무튼 어떻게든 닮겠지만.

by kimloco

기쁨아. 병원에 가면 너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아기의 심장은 어른의 그것보다 훨씬 빨리 뛰어. 건강하게 움직이는 걸 확인하면서 안도의 마음을 갖게 돼. 기쁨이는 다행히도 건강하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만나게 될 날까지 계속해서 그래야 할 텐데 하고 말이야. 엄마 품에 있는 건 너무 대단한 일이면서도 너무 신기한 일이면서도 너무, 경외롭다는 표현을 써야 할 때가 있다면 그건 임신을 하고 있는 엄마와 그 안에 아이에게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MBTI가 F인 아빠는 아주 예전에 지하철에서 임산부를 보고서 괜시리 울컥한 적도 있단다. 너의 엄마를 만나기도 전인데 말이야.


아이를 갖게 되면 병원을 오게 돼.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네가 잘 지내나 검사를 받으러 오는 게 대부분이지. 처음에는 좀 자주 그리고 안정기라고 하는, 네가 엄마 뱃속에서 잘 지낼 수 있겠구나라는 판단이 들면 조금씩 텀을 길게 두고 병원에 가게 돼. 근데 그게 막 쉬운 일은 아니야. 저출산 국가라는데 산부인과 예약은 생각보다 까다롭고 가족과 함께 가는 일정을 맞추려면 그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거든. 우리가 사는 것과 하동은 거리가 꽤 있기 때문에 엄마는 부모님과 함께 갈 수가 없으니까 최대한 엄마랑 같이 병원에 가서 널 만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아. 일을 하면서 마음 편하게 병원을 간다는 게 말이야.


그렇게 검사를 받는 것 중에 입체 초음파라는 것이 있어. 그러니까 얼마만큼 자란 너의 모습을 3D 형태로 보는 거지. 우리는 보통 초음파라는 것으로 흑백의 사진으로 만나거든. 근데 이 입체초음파라는 것을 하면 너의 얼굴과 몸의 모습을 대충은, 너가 얼마나 협조를 해주느냐에 따라 대애애애충은 확인할 수가 있거든. 생각해 봐. 상상만 하던 아기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보게 되는 그 부모의 기쁨을. 잘 모르겠다고? 사실 우리도 잘 몰랐어. 어디가 머리지. 어디가. 대체 어디가. 아. 입체 초음파를 보고 엄마는 처음 너를 아들이라고 생각했어. 고추가 엄청 크다면서. 근데 그거 탯줄이라고 간호사 선생님이 말해주셨지. 아기에겐 그렇게 큰 고추가 있을 수 없어…..


입체 초음파 사진을 보게 된 순간부터인 것 같아. 보통 대부분은. 누구를 닮았네의 시작은. 이건 아마도 끝이 없을 거야. 기쁨이가 세상에 나오게 된 순간부터는 더 많이 듣게 되겠지. 입체 초음파를 보고 일산 할머니는 아빠가 콧대가 있어서 그런지 기쁨이도 그런 것 같다고 했어. 그게 또 본인을 닮아서 그런 거라며. 그리고 나는, 코웃음을 쳤지. 아니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아이의 콧대가 누구를 닮긴 뭘 닮아요. 사진이 뭐라고 이걸 어떻게 알아. 이럴 때의 아빠는 영락없이 MBTI가 T인 사람처럼 변해. 어른들은 태어날, 태어난 모든 아이를 두고 그러거든. 눈이 누굴 쏙 빼닮았네. 귀가 딱 엄마야. 쟤는 하는 게 꼭 지 아빠를 닮았어. 이런 말들.


그래서 생각해 봤지. 기쁨이가 누구를 닮으면 좋을까. 닮는다고 하는 건 일단 외모가 가장 크겠지? 근데 이건 사실 정해져 있는 답이야. 너가 딸인 걸 알아버린 순간부터 너는 엄마를 닮아야 해. 엄만 꽤 예쁜 편이거든. 근데 그거 알아? 엄마는 자꾸 박보검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들이라면 말이야. 근데 엄마가 오보람이고 아빠가 김정우인데 어떻게 박보검이 나와. 그렇지? 그리고 그것도 알아? 첫째 딸은 아빠 닮는데. 너의 고모도 일산 할아버지를 엄청 무지 닮았어. 미안해 기쁨아.


닮는다는 건 그런데, 외모만은 아닐 거야. 성정. 두뇌. 행동. 그런 것들. 그게 나와 보람이에게서 그리고 그 부모님들에게서 그리고 또 그 부모님의 부모님들에게서 계속해서 내려오는 것들이겠지. 우리는 보통 그런 걸 유전이라고도 하고. 근데 그게 꼭 유전만은 아니잖아. 태어난 이후로 기쁨이가 아빠와 엄마랑 같이 보내는 시간 동안 말투, 습관, 사고방식, 식성 등을 또 닮겠지.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닮아지는 사이가 될 거야.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은.


하지만 웃기지. 자신을 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들은 자꾸 자가기 가지지 못한, 하지 못한 것들을 자식들이 갖길 바라. 그게 더 나은 삶이 될 거라면서. 그게 더 필요한 것일 거라면서. 그게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 혹은 알아도 모르는 척하면서. 일산 할아버지, 아빠의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어. 아빠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자꾸 나에게 사막 마라톤을 하고 오라는 거야. 아니 그냥 마라톤도 못하는데 뭔 사막 마라톤이야. 아니면 극지여행. 아니면 또 뭐라 그랬더라. 자꾸 해외에 나가서 뭐라도, 엉망진창의 경험이라도 하고 오길 바랐어. 할아버지가 그렇게 살지 못했고 그런 배포 넘치는 성격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그래서 계속해서 고모나 아빠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거야. 너의 고모는 그래도 아무튼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 꽤 오래 있기도 했는데 아빠는 싫더라고. 그래서 어학연수든 뭐든 여행 말고 나간 적이 없었어. 아빠는 꽤 겁이 많거든. 그리고,


아빠는 할아버지를 좋아했어. 과거형으로 쓰니 뭔가 좀 이상한데. 좋아해. 할아버지가 아빠의 롤모델이었지. 그리고 고모가 아빠의 가장 가까운 롤모델이었어. 그래서 늘 고생했거든. 아빠 멋대로 살고 싶은 자아와 할아버지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커가는 내내 그랬던 거 같아. 그리고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할아버지와 닮은 삶을 택했지.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 안 할지 모르지만. 결국 할아버지의 그림자를 쫓아간 것 같아. 그래서 그게 안 좋은 거냐면, 모르겠어. 닮고 싶은 부모님을 만난다는 건 아주, 꽤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렇지만 그게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삶의 방식을 권장하는 건 아니니까.


아마도 너는, 나를 닮고 엄마를 닮겠지. 어떤 얼굴이고 어떤 마음이고 어떤 말을 하건 간에. 아빠의 지금과 옛날과 엄마의 모든 시간에서 아주 자유로울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나는 또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될 것만 같아. 나를 안 닮았으면 좋겠는 것들을 생각하는. 나랑 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생각나는 한 가지는. 너가 조금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는데 (할아버지의 생각과 이것마저도 닮았네!) 뭐랄까, 사막 마라톤이나 남극 여행이나 이런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주도적이고 조금 더 기쁨이 너로서 충만했으면 좋겠어. 이건 자존감이랑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아빠는 생각보다 아니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다른 사람과 더 많은 시선과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도 생각해고 배려하고 고민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거든. 그렇지만 다 알지도 못하는. 그래서 적어도 기쁨이는 나보다 조금은 더 무던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나를 닮은, 나를 닮을 너를 생각하다 보니 떠올랐는데 예전에 왕가위라는 감독이 만든 ‘마이블루베리나이츠’라는 영화가 있었어. 거기에는 어떤 결심을 하는데 화이트칩(white chip)을 사용하거든. 그래서 그걸 보고 그때 쓰던 블로그에 my white chip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 내가 아빠가 되면 – 나의 장래 희망은 좋은 아빠였으니까 – 이렇게 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근데 그러다 보니 문득, 거기에 할아버지에 대한 아쉬움만 계속해서 적고 있더라고. 나는 할아버지처럼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그래서 그렇게 쓰던 걸 멈췄어. 나는 할아버지가 고마운데, 좋은데 왜 이런 걸 하고 있나 하고. 막상 부모가 될 준비를 하니 할아버지가 아빠에게 해준 무엇 하나만큼이라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기쁨아, 나는 네가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무서운 생각이 들어. 아빠는 아직도 세상이 어렵고 사는 건 참, 쉽지가 않은가 봐.


그래도 계속해서 너가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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