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도 딸도 아닌 그냥 '나'로 남고 싶다면
일요일 아침 전화를 붙들고 있는 남편은 내내 알았어, 보고 갈게, 아, 알았다니깐... 이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여자는 무슨 일인가 하고 힐긋힐긋 통화가 끝났나 확인하다가 전화기를 내려놓는 남편을 보고 걱정스럽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엄마가... 전기장판에 불이 안 들어온다고 하는데. 한 번 봐달라고. 얼마 전에는 tv가 안 나온다고 하시더니... 연세가 많은 부모님은 종종 전자제품이 말을 듣지 않거나, 쇼핑이 필요할 때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신다.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져서 전기장판이 필요하실 텐데 얼른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여자의 말에 남편은 잠깐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일로 채워진 일주일에 하루는 집에서 편안하게 쉬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남편은 귀찮은 내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성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모님 일이라면 앞뒤 없이 뛰어나가고 보는 효자도 아니었다.
여자의 엄마도 보일러나 새로 산 전기밥솥이 잘 작동되지 않을 때 여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하셨다. 부모님께서 연세가 드실수록 자식의 도움을 더욱 필요로 하시는 것 같다. 양가 부모님 모두 만날 때마다 코앞에 스마트폰부터 내미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은 여자도 퉁명스럽게 엄마, 그냥 기능이 좀 간단한 제품을 써요. 이건 젊은 나도 너무 복잡해서 못쓰겠다. 무조건 좋은 게 좋은 건 아니라니깐. 너무 어렵잖아. 하며 볼멘소리를 할 때가 있다. 그 말을 하는 여자의 마음속에는 부모님께서 점점 당신 스스로 하실 수 있는 일이 줄어드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엄마, 내가 일도 해야 하는 데 거기까지 언제 가봐요? 엄마의 전화에 말은 그렇게 하지만 딸이 올 때까지 꼼짝없이 손놓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먹고사는 일이 갈수록 팍팍해지기만 하는데 양쪽 집으로 뛰어가야 하는 일이 자꾸만 생기니 여자는 쉬는 날도 불안할 때가 많은 것이다.
그럼, 얼른 다녀올게. 오후에나 잠깐 들르지 뭐 하던 남편은 결국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그러고는 일요일 하루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다저녁때가 되어 돌아온 남편에게 여자는 뭐가 문제였던 거냐고 물었다. 사실 묻고 싶은 건 여자가 함께 오지 않은 것에 대해 혹시나 시부모님께서 언짢아하시지는 않았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왠지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은 내내 여자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는데 말이다. 아니, 별것도 아니었어. 그냥 전원을 길게 꾹 누르면 켜지는 거였는데 엄마가 몰랐나 봐. 간단하게 해결했지 뭐. 점심은 먹고 온 거야?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됐는데... 응, 아들 고생했다고 장어 사주시던데. 집에 들어가니깐 벌써 밥 먹으러 나갈 준비 다 하고 계시더라고. 그래서 저녁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아직 배부르다. 응, 알았어. 어머님, 아버님께서 아마 아들 맛있는 거 먹이고 싶으셔서 연기 좀 하셨나 보다. 그치? 흐흐 그런가? 저번에는 식탁을 보러 가자고 불러내셔서 소고기 사주셨잖아. 혼자 있는 부인 것도 좀 챙겨오면 안 되나?라는 말이 튀어나오다가...같이 가면 더 좋았잖아 하는 말이 나올 것 같아 다시 말을 삼켰다. 맞는 말이다. 일요일인데 모처럼 남편과 함께 시댁에 가서 이것저것 불편한 것도 봐드리고 함께 밥도 먹고 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여자는 왠지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의 엄마는 맛있는 거 좀 사드리려고 해도 사위 없이 우리끼리 먹는 거 편치 않다며 손사래를 치시고, *서방도 먹이라고 여자의 손에 뭐라도 하나 들려 보내려고 실랑이를 벌이기 일쑤인데 말이다. 여자는 장어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아니었다. 별로 먹어 본 적도 없어서 장어가 무슨 맛인지도 모른다. 그저 그 순간 여자의 엄마가 떠올라 입맛이 쓸 뿐이었다.
모든 것이 여자의 잘 못인 것만 같았다.
여자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형편도 빠듯해서 결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인연이 되었는지 남편을 만나 늦은 나이에 결혼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결혼 전, 늦은 밤 차 안에서 남편과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자기 힘으로 얼마 가져올 수 있어?라고 여자가 물었고 남편의 대답만큼의 돈을 여자도 마련했다. 둘이서 합쳐도 얼마 되지 않은 돈이었지만, 함께 살 원룸을 구하고 여자가 쓰던 살림살이들을 그대로 들고 갔다. 서로에게 사준 가느다란 커플링으로 결혼반지를 대신하고 결혼식을 제외한 모든 것을 생략했다. 하지만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자의 엄마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딸 셋에 막내아들이면 얼마나 귀한 아들이겠냐고. 모든 것을 생략해버린 아들의 결혼식에 사부인이 얼마나 섭섭하시겠냐고 마음 졸이는 엄마가 여자는 내내 의아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돈을 합쳐 구한 집은 반전세 원룸이었고 그 외 여웃돈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파트도 아니었고 더욱이 전셋집도 아니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였던 것이다. 엄마, 형편이 안되는데 굳이 왜 무리를 해야 되는 거야? 응? 그래도 그게 아니야. 어른들이 얼마나 섭섭하시겠니? 나는 네가 나중에 미움이라도 받을까 봐 아주 걱정이다. 여자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역시나 엄마의 말이 맞았는지 예비 시부모님께서는 결혼식이 다가와도 일절 아는 척을 하지 않으셨다. 오죽하면 여자는 남편에게 부모님께서 우리 결혼하는 거 아시는 거 맞아?라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잊지 말고 결혼식에 꼭 오셔야 할 텐데...라며.
여자가 생각하는 결혼은 간단한 것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사는 것. 거기에 왜 복잡한 생각들이 끼어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남편도 그녀 자신도 결혼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행복해야 할 결혼이 의무감만 남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주변에서 많이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럼 생활비를 각자 내는 거야? 엄마의 질문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희들은 서로 얼마를 버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사는 거야? 응. 그럼 돈은 언제 모으냐? 얼른얼른 모아서 전셋집도 구하고 그래야지. 각자 생활비만 내고 나머지는 다 써버려도 모르는 거야? 쓸 돈도 없어, 엄마는... *서방이나 나나 얼마나 번다고. 생활비 내고, 각자 보험료나 뭐 그런 거 내고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카드값 내고 그러면 땡이야. 시부모님 용돈도 *서방이 직접 주는 거야? 너는 얼마나 주는 지도 모르고? 응, 그렇지 뭐. 그러면 어디 며느리 면이 서겠니.
그래서일까. 여자의 시부모님은 여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섭섭한 마음이셨겠지만, 이내 결혼을 해도 아무 변화가 없는 아들의 일상에 오히려 안도하셨을지도 모른다. 원래 착하고 순한 성격의 아들이고 굳이 며느리를 거치지 않아도 되니 아들과의 관계가 결혼 전과 다름없이 느껴졌을 것 같았다. 며느리가 된건지 아닌지 내내 시댁에서 겉돌기만 하는 여자가 엄마는 몹시 걱정스러웠다. 그럼 부모님께 잘하는 걸 뭐라고 해? 자식이면 당연한 거 아니야? 나도 엄마한테 잘 하잖아. 네가 잘하긴 뭘 잘해. 뭐든지 다 알아서 한다고만 하고, 찬바람이 쌩쌩한 것이. 여자의 엄마는 여자의 강한 독립심이 키우는 내내 의젓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여자를 덮쳐왔다. 남편은 지금 유일한 그녀의 가족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얽히고 설키는 관계에는 부담을 느꼈다. 그래서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약한 연결고리로 남편과 여자를 연결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이도 없고 재산도 없고 얽혀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 언제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그뿐이야. 돌아가다니 무슨 엉뚱한 소리야? 늦은 밤 잠에서 깨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여자를 남편은 어이없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왠지 우리가 가족이 아닌 것 같아. 여전히 자기는 어머님, 아버님 가족인 것 같단 말이야. 나는 거기에 속할 수가 없다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우리 관계도 끝나는 거야? 그런 거야? 여자는 갑자기 불안했다. 사랑도 언젠가는 식는다는 데... 그러면. 왜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살아가는지 이해 할 것도 같았다. 며느리 도리를 안하면 가족도 아닌거야? 왜 사람이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해?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장어는 여자의 마음속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덧 상어가 되어 여자를 집어삼킬 지경이었다. 여자는 이 결혼 관계를 유지시켜 줄 아무런 패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결혼은 애정에 근거한 관계가 아니었던 걸까. 그냥 함께 살아가는 게 아닌거냐고? 내 자식과 함께 사는 사람인데 좀 따뜻하게 감싸 주실 수도 있는거잖아. 며느리는 시댁에서 가족으로 존재 했던 적이 없었나보다. 여자는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쳤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알아. 나도 지금 내가 이상하게 굴고 있다는 거 알아. 솔직히 말하면 며느리로 따뜻하게 대해 주신 적 없으니까 나도 며느리 노릇 하기 싫어. 하지만 뼈속까지 박혀있는 도리에 대한 강박 때문에 죄책감이 엄청 나단 말이야. 우리 엄마가 딸 미움 받을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시는 것 처럼... 나도 그렇단 말이야. 애정에 근거한 관계라고? 결혼은 어쩌면 철저한 파워게임 일지도 몰랐다.
#결혼을하고보니 #스몰웨딩 #며느리도리 #며느리노릇 #시어버니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