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너희 아버지랑 나도 곧 칠순이잖아. 상 차리려면 말이야. 상이라니, 무슨 상? 여자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듯이 내뱉는 말을 엄마는 못 들었는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너희들이 그 때 갑자기 목돈 내놓기 힘들 거 아니냐? 그러니깐 미리부터 둘이서 얼마씩 내서 적금이라도 들어야 되는 거 아니냔 말이지. 다른 집들은 다 그렇게 한다더라. 왜 저기 **이 오빠네는 아들, 딸들이 딱 결혼 하고부터 꼬박꼬박 모은다잖아.
여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몇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 가스레인지는 화구가 두 개뿐인데 그 마저도 간격이 너무 좁아서 한쪽에 냄비를 올리면 나머지 하나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래서 고작 국 하나를 끓이고 몇 가지 음식을 준비하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코로나로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것을 꺼려하는 엄마를 위해 여자는 집에서 엄마의 생일상을 차리기로 했다. 무릎이 아파 걸음을 옮기는 것도 쉽지 않다는 엄마는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야 하는 수고로움을 생각해 몇 번이나 망설이기도 했다. 내가 집으로 가는 건 좀 그렇다고, 엄마. 아버지랑 마주치기도 불편하고 말이야. 사실 여자는 엄마의 정글 같은 부엌에서 생일상을 차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엄마에게서 나고 자라, 엄마 밥을 먹고 삼십년 가까이 살았지만, 여자에게 그 부엌은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 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냥 우리 집에서 간단하게 점심 한 끼 먹자고... 힘들겠어, 엄마? 사실 간단하게 점심 한 끼를 먹기 위해 한 시간 가까이 되는 거리를 움직여야 하는 것이기에 엄마는 더 망설였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냥 넘어 갈 수는 없잖아... 사실 엄마에게 금요일 점심을 대접하고 싶은 이유가 여자에게는 또 있었다.
여자의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의 생일은 불과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해마다 두 어머니들의 생일이 있는 주말에는 어디를 먼저 가야 하나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생일 날짜와 상관없이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시댁에서 먼저 날짜가 정해지면 나머지 요일에 엄마를 만났다. 남편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여자는 그 쪽이 마음 편했다. 하지만 요즘 토요일도 일을 하는 남편이 무척 피곤해 보이기도 해서 이번에는 주말 하루는 집에서 쉬게 해주고 싶었다. 엄마한테는 나 혼자 가도 돼. 여보는 피곤할 텐데 그냥 집에서 쉬어. 사실 결혼 이후로 엄마의 생일날은 줄곧 셋이 함께 했지만,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고 보니 여자는 더 이상 그런 형식적인 자리를 갖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로 인해 발 디딜 틈 없는 시어머니의 생일이 떠올라서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사위를 보며 뿌듯해 하는 엄마를 보면서 여자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장모님 생신인데 내가 가야지. 아무도 없잖아. 그 마음은 너무 고마운데... 그냥 밥 한 끼 얼른 먹고 올게. 그래도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여자는 남편이 참석 할 수 없는 금요일 점심을 떠올린 것이었다. 남편이 없으면 눈에 띄게 서운해 할 엄마의 모습이 여자의 눈에 선했지만, 그래도 남편이 없으면 언니가 올 수 있을 것이다. 그 쪽이 여자에는 더 편하고 자연스러운 자리되었다. 세상의 기준에만 빗대어 생각하면 사는 게 너무 피곤하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더기 같은 가족의 모습을 언니와 자신이 이리저리 채워 가면서 잘 살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자가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는 모든 가족 행사에 부모님은 ‘사위’부터 떠올렸다. 여자는 남편이 혹시나 갖게 될 부담감도 신경 쓰였지만, 남편이 함께 하면 엄마도, 언니도, 아버지도 눈에 띄게 어색한 모습이 되었다. 누구하나 편하지 않는 그 자리에서 여자는 내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친정식구들의 눈치를 살피며 마음을 졸여야만 했던 것이다. 그냥 편하게 우리끼리 만나면 안 돼는 거야? 이제 다 가족인데 안 편한 건 뭐야? 가족이니까 자꾸 만나고 부딪혀야 정도 쌓이고 그러는 거지. 여자가 생각하기에 엄마에게 가족은 종교와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겉모양이라도 가족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엄마는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다른 집들 좀 봐라. 다들 자기네 가족 밖에 몰라. 얼마나 똘똘 뭉쳐서 단합이 잘 되니? 우리 집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제 각각인 집은 없을 꺼다. 여자는 엄마의 ‘가족 단합론’이 또 펼쳐지기 전에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꼭 그 단합을 나랑 *서방이랑 하냐고? *서방 보기 부끄러워 죽겠어. 그냥 편하게 삽시다, 엄마. 우리가 언제 가족이라고 모여 앉아서 단합하고 그랬어? 여자가 결혼을 하자 가족의 모양을 유지하는 역할이 온전히 여자에게 맡겨져 버린 것이다.
여자는 변변치 않지만 직접 만든 음식들을 상위에 하나 씩 올리기 시작했다. 갖가지 성인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엄마를 위해서 신경 써서 만든 음식이었다. 엄마의 삶은 나이가 들어도 편안해지지가 않았다. 벽에 'HAPPY BIRTHDAY' 갈란드를 붙이고 풍선도 불었다. 거창하지 않은 생일 파티였지만 여자는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여자의 집을 향해 오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니 짠하기도 하고 왠지 설레기도 했다.
여자가 만든 음식을 먹고, 여자가 담근 김치를 먹고도 엄마는 별 말이 없었다. 엄마 가방에 김치 들어 있어. 아무리 가져가라고 해도 너는 말을 안 듣니? 김치도 갖다 먹고 해야지. 좀 꺼내와 봐. 상이 작아서 놓을 자리도 없어, 엄마. 우리 김치 꺼내 놨으니깐 그냥 드셔요. 도마랑 다시 꺼내서 썰려면 일 많아.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엄마가 가져온 김치를 봉지채로 냉장고에 넣었다. 무슨 김치를 자꾸 갖다 먹으래. 쟤는 싫다잖아. 엄마는 다리도 아픈데 고생스럽게 무슨 김장이야. 그만큼 하지 말라고 해도... 어차피 있는 거 갖다먹으면 돈도 아끼고 좀 좋아? 아니, 그러니깐 애당초 김치를 왜 있게 하냐고. 담그지 말란 말이야. 식구도 없고 먹을 사람도 없는데 엄마는 왜 고집을 부려? 그래놓고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고 또 난리 칠거면서. 언니는 엄마의 끝나지 않을 김치 얘기를 막아보자고 나섰지만 세 사람이 밥상에 마주 앉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리고 가방에 멸치도 좀 있지? 너 멸치는 볶을 줄 알아? 프라이팬에 기름 넉넉하게 두르고 말이야... 달달 볶아서 양념장을... 엄마, 그냥 식사 하셔. 쟤도 앉아서 밥 좀 먹자. 요즘은 인터넷에 자세하게 잘 나오는데 뭘 그걸 말로 설명하고 있어? 쟤는 볶아 먹든 삶아 먹든 지가 잘 알아서 하잖아. 옆에 있던 언니가 말리지 않았다면 엄마는 언제나처럼 여자에게 반찬 만드는 법을 끝도 없이 설명하려고 했을 것이다. 여자는 그럴 때마다 엄마의 마을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엄마는 부모의 위신을 세우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제는 다 커서 음식마저 제 손으로 해먹는 자식을 보며 엄마의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엄마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약한 사람이기도 했다. 여자는 엄마의 그런 기분을 헤아려 주고자 앞뒤 없이 읊어주는 요리법을 가만히 듣고 있을 때가 많았지만, 오늘 따라 여자는 그런 엄마가 피곤하기만 했다.
엄마는 칠순 때 얼마나 거창한 상을 받으려고 우리한테 적금까지 넣으라는 거야? 나는 전혀 할 생각이 없는데... 해야 되는 거야, 엄마? 여자의 도발적인 질문에 엄마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아니, 그리고 상을 도대체 어디다가 차릴 거야? 우리가 칠순이라고 상 차려 놓으면 같이 먹을 사람이나 있어? 여자는 사람을 찾듯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고 엄마가 아버지랑 손 붙잡고 여행을 갈 거야, 뭘 할 거야? 무슨 명목으로 적금을 들라는 거야, 엄마는? 아이고,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지. 얘가 왜 이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너희 아버지는 칠순 잔칫상 차려 준데도 싫다고 하고 밖으로 돌 거다. 그런데 그 상을 그럼 나 혼자 받겠냐?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엄마가 그냥 해 본 소리라고. 엄마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 있었다.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닌데 뭘 그래? 엄마가 먼저 언니랑 같이 돈 모으라면서? 그렇게 자식을 떠보듯이 얘기 하지 말고 하고 싶으면 그냥 하고 싶다고 말을 해요. 그럼 내가 당연히 하지, 않해? 내가 뭐 돈이 아까워서 그러나. 우리 가족이 언제 그렇게 둘러앉아서 칠순 잔치하고 그럴 줄 몰라서 그러지. 그런 걸 해야 되는 줄도 몰랐다고요. 아니, 너희 아버지가 저렇게 밖으로 도는데 칠순 잔치는 무슨 칠순 잔치야?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아니 엄마, 내가 먼저 말 꺼낸 거야? 엄마가 먼저 칠순잔치 상 차리게 언니하고 나랑 돈 모으라고 그랬잖아. 언니도 말 좀 해봐. 언니가 되가지고 돈 모아서 준비해야 되는 거면 먼저 동생한테 하자고 해야지. 여자는 점점 목소리를 높이며 내내 핸드폰만 들려다 보고 있는 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됐어, 그만해. **아줌마가 얼마 전에 자식들이 잔칫상 주문해서 차려 드렸데. 왜, 그 돌잔치 상처럼 그런 거 말이야.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다해서 부부가 같이 사진도 찍고 엄마한테 자랑을 했나 보더라고. 언니는 마치 엄마가 옆에 없는 듯이 여자를 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엄마도 당연히 부럽겠지. 그런데 우리 집이 어디 그런 거 할 처지가 되냐? 엄마는 아직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거야.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미련을... 그제야 엄마의 존재를 인식한 듯 언니는 엄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엄마, 나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안 만나. 왜냐하면 나랑 공감대가 없거든. 자식 키우는 얘기, 남편 얘기 하면 내가 뭐 아나? 안 그래? 엄마도 남들처럼 칠순 잔치도 하고 여행도 가고 싶고 그런 마음 다 이해 가는데, 우리 형편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도 엄마가 그냥 하는 얘기니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언니는 자식이 돼서 어떻게 엄마가 하는 얘기에 신경을 안 써? 엄마가 칠순 잔치 하고 싶다면 해야 하잖아. 아니 엄마, 그러면 진짜 칠순잔치 하고 싶어? 내가 하고 싶기는 뭘 하고 싶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그렇다는 건 또 뭐야... 엄마가 하고 싶으면 우리 셋이서, 이 집이든 우리 집이든 상 차려 줄게. 그런데 엄마는 분명히 아버지 빼놓고 나 혼자 어떻게 그러냐고 하면서 계속 전전긍긍 할 거잖아. 안 그래? 가족이 단합해야지 하면서 말이야. 엄마는 아버지랑 *서방이란 다 둘러앉아서 칠순 잔치 하고 싶은 거잖아.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가능 한 일도 아닐뿐더러 그렇게 곤혹스러운 자리를 꼭 만들고 싶냐고? 아버지만 잘못한 거 아니야. 그런 아버지를 떨치지 못하고 내내 전전긍긍 하면서 우리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엄마도 분명 잘못이라고.
나이 칠십을 앞두고도 엄마는 아버지를 마음에서 지워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딸들에게 아버지를 마음속 깊이 미워하게 만든 엄마는 정작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남편은 어쩌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속한 온전한 가족의 모습을 포기하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결혼 후 지금까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엄마는 언제나 딸들에게서 위로를 찾으려고 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고, 엄마에게 얼마나 큰 잘 못을 했는지 여자는 듣고 또 들었다. 엄마가 쏟아놓은 감정들을 흡수 하면서 여자는 자라났고, 엄마를 위로하면서 여자는 자신이 성숙해졌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의 바람대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쌓이고 쌓여 아버지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기 힘들어 졌을 때쯤 엄마는 표정을 싹 바꾸었다. 엄마와는 사이가 그래도 너희들에게는 아버지 아니냐... 자식이 돼서 그러면 못쓴다. 자식 도리는 하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처럼 살고 싶다고도 했다. 엄마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여자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엄마의 화에 같이 분노하고 그 분노에 함께 쏟아냈던 말들은 엄마로부터 다시 부정당한 것이다. 나는 그래도 너희들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엄마, 엄마는 감정이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정확하게 구분이 돼?
아니, 왜 *서방은 전화 한통이 없니?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섭섭해 하는 줄 아니? 아주 난리다 난리. 왜 자식전화는 평생 안 기다리면서 새삼스럽게 사위 전화는 기다리는 거야? 그건 무슨 마음이래? 언제 우리가 서로 안부전화 하고 그러고 살았어? 새삼스럽게 남의 집 아들한테 부모 대접 받으려고 그래? 여자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엄마의 목소리가 한층 수그러들었다. 너도 참... 부모가 자식 안부가 궁금해서 그러는 거지 부모 대접은 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서방을 언제 봤다고 자식이 다 뭐고 안부는 또 뭐가 궁금하냐고. 그냥 언니나 나한테는 안 통하니까 *서방한테 어른 대접 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뭐, 사위가 네, 네 하니깐 큰소리 치고 싶어서 찾는 거라고... 혹시 네가 *서방한테 너희 아버지 얘기 하고 그런 건 아니냐? 그래서 장인이고 장모고 다 우습게보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너 남편이라고 이 말 저 말 안 가리면 그게 나중에는 다 네 흠이 되는 거야. 내 흠이 되든 말든 상관없어. 나는 속상한 거 있으면 남편한테 다 말하고 살 거야. 이 눈치 저 눈치 다 보고 살아야 하는 부부라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나은 거 아니야? 엄마는 만날 흠타령이야. 아버지가 잘못한 거지 우리가 잘못한 거냐고? 나이 들면 무조건 다 이해하고 무조건 다 떠받들어야 하는 거야? 여자는 자신의 말은 못 들은 체 하고 행여나 부모의 흠을 사위에게 말했을까봐 딸을 닦달하는 엄마가 낯설기만 했다. 이럴 때는 엄마나 아버지나 똑같은 거 같아. 결국 부모는 부모고 자식을 자식이라는 거네.
엄마, 다른 집처럼 살고 싶으면 말이야... 아버지도 평생 밖으로 도는거 딱 참고 가족들 챙기고 사셨어야지. 엄마도 아버지 때문에 힘들다고 딸들 붙들고 하소연하지 말았어야지... 그랬어야지. 하고 싶은 데로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우리들만 자식도리 안 하는 것 같아서 괘씸한 거야?
여자는 며칠 전 엄마와 했던 전화통화를 떠올렸다. 엄마와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온 남편을 보며 내내 섭섭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여자는 외면하고 싶었지만 덩달아 친정아버지를 외면하는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모순되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어 여자는 답답하기만 했다. 여자는 아직도 자신이 엄마와 아버지가 만든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그러니깐 너도 엄마가 이런 얘기 하면 한귀로 듣고 흘려버려. 엄마는 딸들이 어떻게 사는 지 눈에 보이지도 않으신가 봐. 언니는 그게 가능해? 나는 안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만날 머리 싸매고 그러고 있는 거야. 딸들이 친구 같아서 좋다고? 쳇, 붙들고 하소연 할 사람이 있어서 좋은 거겠지. 엄마, 쟤한테 엄마 스트레스 좀 옮기지 말아요. 엄마가 그렇게 사는 건 엄마 선택이잖아. 우리가 뭐 그렇게 살라고 그랬어? 그런데 속상하다고 만날 쟤만 붙들고 하소연 하면 어떡해? 안 그래도 예민한 애를. 자식들한테 기대지도 말고 자식도리 바라지도 말고.... 응? 내가 너희들한테 언제 뭐 해달라고 했니? 돈을 달라고 했어? 뭐를 했어? 기대지 말라니.... 엄마, 차라리 그게 나은 거야. 칠순 때도 용돈으로 드릴게. 우리 각자 열심히 모아서 많이 드릴 테니깐 괜히 어설프게 가족끼리 모여서 잔치하자는 얘기는 하지도 말란 말이야.
부모는 정말 자식을 왜 키우는 것일까, 여자는 궁금했다. 여자에게 왜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냐고 하는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한데, 요즘은 딸이 최고라고 한단다. 딸이 둘이나 있는 엄마를 사람들이 부러워한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엄마는 그 옛날 아들이 없어 왠지 기가 죽는다 말을 할 때의 엄마의 모습과 달리 의기양양해 보였다. 다 같은 자식인데 더 좋은 게 어딨어? 여자는 어느 쪽이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부모에게 도움이 되는 쪽을 선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나마 딸이 있어서 다행이지... 하지만 여자는 아침에 핸드폰이 울리면 ‘엄마’라는 글자를 화면에서 보게 될까봐 겁이 났다. 엄마의 끝나지 않는 신세 한탄을 들어야 했을 때는 도망가고 싶기도 했다. 그것이 엄마의 이야기로 부터의 도망인지, 엄마의 인생으로 부터의 도망인지 알 수 는 없었지만 . 엄마는 아버지로 인해 생겨버린 인생의 큰 구멍을 끊임없이 딸들로 채우려고 했다. 여자도 한 때는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지 않고 모든 것을 아버지 탓으로만 돌린 채 무기력하게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딸들도 엄마 인생의 구멍을 메우는 역할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여자는 이제 엄마의 딸이기 보다 그냥 자기 자신이고 싶었다. 더 이상 엄마가 만들어 낸 환상 같은 가족의 모습에 한 부분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생일 모자를 쓰고 케이크를 들고 생일 갈란드 아래에 섰다. 여자가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아이고, 남들이 웃는다. 당장 지워버려. 언니의 손에서 재빨리 핸드폰을 뺏으려는 엄마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언니는 그 사진을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바꿔놓았다. 엄마는 이제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여자는 엄마의 얼굴을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 치고 말았다. 엄마, 제발... 다른 사람 말고 우리를 좀 보면 안 돼? 내가 엄마 생각하는 마음도 좀 봐달란 말이야. 이거 다 별거 아니라도 내가 아침부터 얼마나 고생 한 줄 알? 엄마는 왜 만날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가족처럼 보이는 것만 신경 쓰는 거야? 우리끼리 그냥 이렇게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우리끼리 재미있고 행복하면 그만 인거 아니냐고... 엄마는 대답이 없었고, 엄마의 생일 파티는 결국 그렇게 끝나버리고말았다.
엄마와 어린 두 딸은 아버지를 피해 항상 작은 방에 함께 있었다. 그때 그곳이 어린 여자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곳에 셋이 함께 있을 때 여자는 가장 마음 편하고 행복했다. 여자는 자신이 아직 그곳에 있는 것만 같은데... 하지만 여자와 언니는 그곳에서 나와 저절로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엄마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남 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그럴듯한 가족을, 번듯한 부모가 되어 대접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누구에게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는 ‘진짜’ 가족의 모습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언니의 말대로 엄마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자의 눈에 아직 그 작은 방에 있는 사람은 언니와 여자가 아니라 바로 엄마 자신 인것 같았다. 자신의 행복을 끊임없이 남편과 자식에게서만 찾으려고 하는 엄마 말이다.
엄마, 우리는 결국 스스로 행복 할 수 있어야 진짜 행복한거 아닐까. 남들이 무엇을 행복이라고 믿는지 상관없이 말이야... 나는 그렇게 살고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