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은 넘은 역사를 가진 런던의 지하철은 출퇴근 시간에 빠져나오기라도 할라치면 좁은 굴 같은 곳에서 사람들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한다. 런던의 일상은 클래식하고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낡고 오래되고 불편하기도 하다. 박물관에서 봤던 유씨몰 치약_Euthymol을 부츠_Boots에서 사고, 느릿느릿한 이층 버스의 지붕을 때리는 요란한 플라타너스 나무 열매 소리에 놀라지 않을 때쯤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기 며칠 전부터 짐을 정리하고 빨래를 해 놓으면 날은 잔뜩 흐리다. 내내 반짝반짝하던 날씨가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흐려져서, 짐이 많은 나는 언제나 걱정이 앞서야 했다. 콜롬비아로드 마켓에서 산 커다란 화병과 청동 화분 장식품, 두꺼운 책 몇 권, 엔젤 앤티크마켓에서 산 접시 몇장과 찻잔 세트 등등 내가 챙겨야 할 짐들은 언제나 끔찍하게 무겁거나 다루기 조심스러운 것 뿐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망설이고, 몇 번이나 발걸음을 돌린 후에 산 것들이라 쉽게 포기 할 수도 없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는 언제나 햄스테드 히스_Hampstead Heath에 오른다. 런던 북서부, 햄스테드 지역에 있는 언덕 정도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히스는 들풀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들판을 의미한다. 동네 뒷동산에 오르는 기분으로 가볍게 올라가다 보면 탁 트인 너른 들판과 함께 런던 시가지가 저 멀리 펼쳐진다. 그곳이 팔리아먼트 힐_parliament hill이다. 전망 좋은 곳에 벤치 하나를 차지하고 앉으면 세상 부러운 것 없는 순간이 된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평화롭고 아름답다. 하염없이 앉아 흘러가는 구름만 보고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는 잡초만 봐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 같다. 번잡한 도시에서 한 발짝 멀어져 있으니 런던에서의 분주한 일상이 마치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움을 좇아 미술관에서 며칠을 끙끙 대기도 했었고, 꽃을 쫓아 낯선 정원에서 헤매기도 했었다. 그러다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몰라 길에서 마냥 울고 싶을 날도 있었다. 하지만 들판에 눈을 감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결국 내가 찾고 싶었던 풍경은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리아먼트 힐은 사진으로는 하나도 예쁘지 않지만, 그 속에 있으면 진짜 예쁜 곳이다.
햄스테드 히스로 가기 위해서는 햄스테드 역에 내리면 된다.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크지 않은 레스토랑과 카페, 갤러리와 상점들이 개성 있는 거리는 느긋하게 둘러보기에도 좋다. 나는 토요일 오전에 열린 작은 마켓과 꽃집을 구경하며 여유를 부리다가 점점 흐려지는 하늘을 보고 햄스테드 히스로 향했다.
런던아이를 비롯해 세인트 폴 대성당 전망대 등 런던 도심을 내려다볼 곳은 많지만,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만큼이나 상쾌하고 멋진 풍경은 없을 것이다. 육체를 흔드는 가쁜 숨소리와 맥박은 산을 오르는 동안 느끼는 자연의 편안한, 고요함과 함께 나 자신을 만나게 한다. ‘셜록’으로 알려진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비치 역시 런던의 멋진 장소로 팔러먼트 힐을 추천했다고 한다. 햄스테드 히스 주변은 시인 존 키츠의 생가가 있고 폴 메카트니가 살고 있으며 가끔 주드 로가 출몰한다고 할 만큼 인기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햄스테드 히스에는 영화 노팅힐_Notting Hill의 촬영지로 알려진 17세기 건축물 켄우드 하우스_Kenwood House가 있다. 이제는 옛날 영화가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그 감흥을 잊지 못해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나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꽃구경만 하고 돌아간다고 해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다. 아젤리아_Azale라고 부르는 이 꽃은 우리나라의 화단에서 봄철에 볼 수 있는 철쭉류의 꽃이다. 자세히 보면 철쭉과 굉장히 비슷한 모습인데, 그 크기와 튼튼함에서 우리네 철쭉과는 다른 힘이 느껴진다. 그림도 보고 꽃도 봤다면 켄우드 하우스 앞에 펼쳐진 잔디밭에서 좀 뒹굴어도 좋을 것 같다.
여유를 너무 부린 걸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런던의 하늘은 햄스테드 히스를 내려올 때 무겁게 내려앉더니 갑자기 비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웬만한 비에는 모자나 외투 깃을 세우는 정도인 런던 사람들도 심상치 않은 빗줄기에 근처 스타벅스 안으로 모두들 뛰어 들어갔다. 나 역시 그 혼잡한 틈에 끼어 있었지만 처음 런던을 찾은 그때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얼마 후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사한 얼굴로 눅눅한 옷을 말려 줄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원래 인생은 정들면 이별이고, 익숙해지면 떠나야 하는 법이다. 꿈꾸는 그곳은 마음속에 있어야 하고, 일상이 되면 빛을 잃어버리게 마련이니까. 다음날이면 나는 묵직해진 가방을 들고 미련 없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술을 마시지 못해서 인지 나는 런던 거리에 흔하디 흔한 펍_Pub에 들어가 볼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다. 그곳에 혼자 앉아 쭈뼛거릴 내 모습은 생각만 해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유명한 리츠호텔_The Ritz London에 앉아 친구와 담소를 나누며 에프터눈 티_Afternoon tea를 즐기지도 못했다. 나는 그곳에서 낯선 이방인이었으므로 친구가 있을리 없었고, 리츠에 갈 돈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런던은 아름답고 즐길거리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저 내 발걸음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닿거나 아름다운 정원에 도착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치거나 힘든 날이면 피시 앤 칩스_fish and chips를 씹으며 하이드파크에 앉아 수시로 지나가는 비행기를 구경하면 된다. 그럴때는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거나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꿈을 꾸는 것이다. 가끔은 사무치게 외롭기도 했고, 가끔은 눈물나게 행복하기도 했다.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기를 방해하는 내 자신과 싸우며 나는 오롯이 나와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다음 날, 지하철 역 매표소에서 히드로 공항을 외치는 나에게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무수히 오고가는 사람들 속에서 낯선 그의 미소만이 떠나는 나를 위한 유일한 배웅이었다.
지금도 런던을 생각하면 꽃향기가 나는 것 같다. 그래도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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