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익숙한 장소, 익숙한 여행을 존중해.
3년 전, 바다가 나오는 동화책을 보다가 아이가 말했다.
"바다 보고 싶어요. 바다 가고 싶어요."
추운 겨울날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속초행 리무진버스를 두 장 예매했다. 비즈니스 좌석처럼 자리를 편하게 뉘이고 아이와 잠도 자고, 바깥 풍경을 보며 이야기도 하며 그렇게 3시간을 달렸다.
강원도의 겨울은 서울의 겨울과 달랐다. 생각보다 더 춥고 차가운 속초에서 한 손에는 아이 손을 꼭 쥐고, 한 손에는 무거운 여행 트렁크를 끌고 택시에 올랐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서자 에메랄드빛 파란 겨울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우와..! 매일 주변을 가득 채운 자동차 소리, 헬리콥터 지나가는 소리, 도시의 소음이 끊겼다
발코니 창문을 열면 보드랍기도, 강렬하기도 한 파도 소리가 요란스럽지 않게 들렸다. 차가운 공기는 깨끗했고, 우리의 겨울 바다는 속초에 머무는 내내 항상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자기 전 살짝 문을 열어두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에 일렁이는 파도소리가 그렇게 평온할 수 없었다.
와... 딴 세상에 온 기분이란..
귀여운 겨울 내복을 입은 아이는 소파와 침대를 폴짝폴짝 드나들며 베개로 집을 만들어 엄마를 초대했다. 따뜻한 방에서 같이 귤을 까먹고, 책도 읽고, 까르르르 웃음이 터져 나올 만큼 장난도 쳤다.
밤바다를 산책하는 일도 춥지만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소중한 아이를 꼭 안고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같이 잠들었다.
푹 자고 일어나면 서두르지 않았다. 그날하고 싶은 일 한 두 개를 정해두고 천천히 움직였다.
아이가 깰세라 새벽 동트는 바다를 보러 발코니로 나갔다. 갈매기 소리와 파도 소리, 맑은 하늘로 솟아오르는 해를 온전히 즐겼다.
아이와 함께 시내버스를 자주 애용했다. 마치 속초 시민이 된 듯한 기분으로 아이 손을 잡고 버스를 타면 할머니들께서 아이를 그렇게 예뻐해 주셨다. 아이와 버스를 타고 마트에 가기도 하고, 청초호 공원에 가기도 했다. 유명한 생선구이집에도 가고 갯배를 타러 가기도 했다. 속초에 머무는 내내 맑고 화창한 겨울날씨여서 우리의 여행은 언제나 즐거웠다. 해가 떨어지고 호텔로 들어오는 길은 택시를 이용했지만,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걷고, 버스를 타고 속초를 누볐다.
그날의 기억이 행복하게 마음에 담겼는지, 아이는 방학, 휴가 때마다 속초에 가자고 했다. 실제로 그 이후로 3년 동안 가장 많이 간 여행지가 속초가 되었다. 이젠 관광객 모드가 아닌 현지인 느낌으로 먹거리를 고르고 구경할 곳을 찾아다니는 수준이 되었다.
사실 다른 곳도 아이와 함께 가보고 싶은데, 아이는 언제나 속초였다.
"엄마, 나는 속초에서 살고 싶어요." 노래를 할 정도로 속초는 아이에게 매우 만족스러운 여행지가 되었다.
속초 말고도 대한민국에 멋진 곳이 얼마나 많은데! 3년을 열심히 속초를 다니고 올해 여름 방학 처음으로 강원도의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갔다. (결국 돌아오는 길에 속초에서 또 실컷 놀고 왔지만..ㅎㅎ)
"엄마, 여기 좋아요!" 바다가 없어서 처음에는 불만을 터트렸지만, 결론적으로 새로운 여행지에도 만족했다.
아이가 즐겨 읽는 책 중에 매년 여름휴가 때마다 같은 장소에서 지내는 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내년에 또 보자, 앤드루라슨) 그들은 매년 같은 바다, 같은 숙소에 머물며 여름을 즐긴다. 아이도 이 이야기와 같은 마음으로 속초를 즐기는 게 아닐까? 언제나 가면 있는 그곳. 그곳에 가면 만나게 되는 행복한 일들.
아이는 그 행복을 무척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한다. 아이가 기대하는 그 설레임을 선물해주고 싶어서, 속초로 간다. 물론, 새로운 곳을 소개해주는 것도 중요해서 한 번씩 목적지를 바꿔보는 시도도 하고 있지만...
도서관, 서점, 동물원, 산책로, 양재시민의 숲, 한강 공원... 속초.. 좋아하고 자주 찾는 장소들.
계절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마주하는 익숙함이 그곳에 있다.
아이의 어제와 오늘을 그곳에 담아 가며 소중한 추억을 쌓아가는 중이다.
이 모든 행복한 순간들이 아이 마음에 꽉꽉 담아지길 소망한다. 언제나 꺼내볼 때마다 힘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