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 사는) 엄마

5. 미디어 노출 없이 키웁니다.

by Aloha J

"아기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텔레비전 치워줘요."

조리원에서 남편에게 부탁한 것은 단 하나.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들이 생각하고 준비한 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들이 많아 혼란스러웠던 그때,

미디어에 대한 것만큼은 준비한 대로

진행하고 싶었다.

조리원에서도 모자동실 시간에는

텔레비전을 켜두지 않았다.

혼자 있는다고 해서 텔레비전을

넋 놓고 볼 정신도 없었지만..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나의 소중한 아기 귀와 눈에

자극이 심한 영상과 소리를 경험시켜주고 싶지 않았다.


해가 뜬 아침이 되면 찬양이나 클래식 음악을

잔잔하게 틀어두고..

낮잠 시간이 될 때마다

자장가 클래식 플레이 리스트를 틀었다.

사랑스럽고 작고 소중한 아가를 바라보면

하루 종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쉬지 않는

수다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내향적이고 조용한 시간을 선호하는 내가

엄청난 수다쟁이가 되다니.


까맣고 초롱초롱한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랑해."라는 말을 안 하고는 못 배길 정도로

아기는 매일 사랑과 기쁨이 되었다.


나름 조용하고 정적인 성격이지만

책을 낭독할 때는 다양한 목소리를 내서

읽는 걸 좋아하는데

그게 아기에게 책을 읽어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흑백초점책을 보는 보송한 신생아 시기는

그렇다 치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알려주는 시기가 되었을 때부터

말 그대로 '난 당신의 성우'를 자청했다.


미디어 없이 책과 수다와 놀이로

우리의 시간을 채우며 아이는 자라오고 있다.


"식당에서 유튜브 안 보여줘요?"

믿을 수 없다는 듯

토끼눈을 뜨는 엄마들에게

유난스럽게 보이기 싫어 내 대답은 한결같다.

"애가 한 명이라 그래요. 둘 이상이면

보여줘야죠. 안 그러면 엄마 못 버텨요."


안다, 다둥이 엄마들의 힘듦과 애씀을.

그래서 나는 진심을 담아 대답한다.


그럼 정말 식당에서 어떻게 하냐고?

주문한 음식이 지금 주방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설명을 해주거나..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잠시 주변을 구경한다.

다행히 아기가 그런 흐름에 잘 적응해 줬다.


버스나 택시에서는 창밖 풍경을 생중계하며

빈틈없이 오디오를 채우고

차 안에선 과일이나 치즈 같은 간식을 먹이고,

노래를 불러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기의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

첫애가 노산인 나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미디어로 그 시간을 대신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애니메이션을 본 적은 없지만,

약국에서 만난 로보카 폴리. ㅎㅎ

도서관 책으로, 경찰서와 소방서를 지나가며

로보카폴리를 즐겼다.

본 적은 없지만 귀여운 타요도

책과 시내버스로 즐겼다.

그렇게 시대의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게

캐릭터도 자연스럽게 만났다.

그 캐릭터들을 꼭 영상이 아니어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게

매번 감사했다.


41개월에 어린이집 첫 입소 후

처음으로 어린이집에서 안전교육에 관한

영상을 보게 된 아기.

집에서는 못 본 재미있는 것을

어린이집에 가면 본다는 점도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됐다.


명절 친정에서 틀어둔 텔레비전을 신기해서

서서 보기도 하지만,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경험이니

그 정도는 예민하게 굴지 않는다.


엄마 손에 들려있는 저 폰 안에

뭔가 재미있는 게 있을 것 같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아이지만,

스마트폰에 노출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꾸준히 설명해 주며 미디어 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반복적인 교육이 아이에게 아직까지는 효과가 있다.


미디어 비노출이 아이에게 혹시라도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디어에 과한 집착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년부터 일 년에 두세 번 방학 때에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

덕분에 우리의 한 해 스케줄에는

방학 극장 데이트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멋진 영화 데이트를 즐기잖아!"

아이의 반응이 긍정적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어릴 적 미디어 중독이었다.

사실 지금도 아이가 없을 때는

미디어에 여지없이 빠져든다.

방 안에서 꼼짝 않고 눕고 앉아서 작은 네모 화면만 바라보다

벌게진 눈, 어지럽고 몽롱한 정신 속에 밀려오는 후회와 허무함.

소중한 시간을 다 낭비하고 버렸다는 자책감.

나만 도태되고 있다는 공포와 불안 속에

또다시 미디어로 도망치는 악순환의 시간들....


내 아이가 이 끔찍한 기분을 경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도 우리는 눈을 마주하고, 걷고, 손을 잡는다.

품에 안고 책장을 넘기며 깔깔 웃는다.

내가 그 시절 갖고 싶었던

진짜 행복과 즐거움을 아이의 시간 속에 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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