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나에게 필요했던 건, 속도가 아닌 지도

by 호시



한 때 나의 세상은 효율과 결과, 명확한 숫자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대학의 전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세상을 보는 나의 첫 번째 렌즈가 된 것은 분명했다. 경제경영학을 공부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나의 첫 세상도 함께 배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기준점에 따라 대상을 카테고리에 넣어 분류하고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판단력과 행동 속도였다. 날카로운 눈으로 그래프를 보고 분석하는 눈이 중요했고, 세상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질문들은 명쾌한 논리나 숫자를 근거 삼아 마땅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편했고, 합리적이었으며, 또 아주 스마트하게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그 스마트한 세상에서 나는 쏟는 마음이나 노력과는 다르게 자꾸만 오답을 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답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아닌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동안에도 내가 아닌 날들은 차곡차곡 성실하게 쌓여갔다. 그리고 이로 인해 마침내 오차 없이 착착 돌아가고 있어야 정상이었을 나의 일상이 한순간에 멈춰버렸을 때, 도망치듯 휴학계를 냈다. 명백한 손실이자, 실패였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학교로도, 고향으로도 돌아갈 수 없어 어정쩡하게 그 자리에 서있기만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더 이상은 나의 괜찮음과 늦어짐을 합당하고 누구에게나 납득 가능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시점에 다다랐을 때, 나는 멀리 도망쳐 지금까지 속해본 적이 없었던 '전혀 다른 세상'으로 꼭꼭 숨어버렸다.


불시착하듯 닿은 그 세상에서 나는 '그 세상의 언어'를 먼저 배워야 했다.

지금까지 아주 명확하고 뚜렷한 선으로 구분되던 나의 세상 단숨에 모호해졌다. 분명 똑같은 대상인데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맥락에 따라 모두 다른 얼굴이 되었고 때때로 완전 뒤집혀 보이기까지 했다. 그곳에선 무엇이든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로 다르게 볼 수 있었고, 다르게 말할 수 있었으며, 또 실제로 다른 것이 될 수 있었다. 마치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숲을 정신없이 헤매다, 우연히 '눈을 수 없는 어떤 세상'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그 시기의 나에게 미술관은 그런 세상이었다.


나의 세상이 나를 찾을 수 없게 꼭꼭 숨으면서도 그 세상의 룰을 어길 자신은 없어서 '이유 없는 공백'을 피하기 위해 '도슨트'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역할로 미술관에 나갔다. 전시 오픈을 앞두고 수십 명의 작가들과 수십 점의 작품에 관해 공부하고 또 입 밖으로 수없이 내뱉으며 그 세상의 언어를, 그들의 말을 익혔다.


그때 내가 가진 언어의 틀에 들어올 수 있는 것에는 한정이 없음도 알게 되었다. 한적하기만 한 미술관에 종종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시간이 쌓이며 찾아든 귀한 깨달음이었다. 오직 나의 전공, 내가 알던 세상에 한해서만 발휘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나의 작은 재능이 순식간에 나를 광활한 우주로 데려다주는 순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세상과, 앎과, 전공 같은, '내가 지니게 된 이름들'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다. 어디에 머물며, 무엇을 내가 가진 언어의 틀 안에 채울 것인지 고민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만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은 그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어졌다. 선택권이 없다고 여겼던 것에 선택지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회화의 기술 (The Art of Painting)>, 1666-1668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라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맞았다. 나는 그곳에서 과거와는 이별한 채 또 다른 곳으로 옮겨온 것이 아니라, 마음껏 다녀볼 수 있는 세계를 넓히고 또 넓혔다. 숫자의 언어가 나에게 명확함과 속도를 알려주었다면, 그림의 언어는 마치 해리포터가 호그와트의 복잡한 복도를 헤맬 때 펼쳐보았던 마법 지도가 되어 나와 동행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길과, 닫혀있는 문을 여는 비밀 암호가 그 안에 있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 지도에서 새로운 땅을 보고 전에 보지 못했던 연결 통로를 발견하며 숨은 암호를 풀곤 한다. 효율의 직선 도로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을 발견하고, 막다른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새롭게 이어지는 길의 입구를 발견하는 과정. 이 글은 그 탐험의 여정을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너무나도 당연하기만 했던 법칙과 방법들 앞에서 순간 멈칫 한다던가, 크게 의문을 가져본 적 없었던 일들이 한순간 낯설게 느껴진다거나, 문득 앞으로의 내 삶에 막막함이 찾아들었다면, 이번에는 이 지도로 다시 내 세상의 땅들을 한 번 살펴보는 건 어떨까?


지금 우리에겐 목표 지점을 찍어주면 오직 그곳을 향해 가는 빠르고 효율적인 길을 찾아주는 내비게이터보다, 나의 눈 닿는 곳을 따라 더 많은 세상으로 향하는 무수한 길들을 보여줄 지도가 필요하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이제 막 펼쳐진 이 지도 위에서, 우리만의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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