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삼원법(三遠法)'이 내 삶이라는 거대한 풍경을 다각도로 조망하며 전체의 지형도를 파악하는 일이었다면, 이어지는 '프레임(Frame)'은 그 넓게 퍼져있던 시선을 거두어 구체적인 한 곳으로 모아내는 일이다. 눈이 위치할 곳을 바꿔가며 전체를 입체적으로 조망했다면, 이제는 뷰파인더를 눈에 대고 특정 씬(Scene)을 눈앞으로 바짝 당겨와 들여다보는 것이다.
연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특정한 순간을 떼어내는 행위는, 마치 세상을 사각의 틀 안으로 포착하는 사진 같다. 우리는 흔히 프레임(Frame)을 '무엇을 담을 것인가'의 문제로 여기지만, 사진 미학에서 프레임이 갖는 진정한 힘은 '무엇을 과감히 잘라낼 것인가(Crop)'에서 나온다. 무한히 펼쳐진 풍경 속에서 프레임을 기점으로 피사체의 고유한 본질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시간을 내 삶에 들이는 일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일시 정지도, 더 빨리 감기도 허락되지 않는 24시간의 궤도 위에서 내 삶의 피사체를 선택해 프레임을 씌운다는 것은, 곧 그 외의 수많은 가능성과 시간들을 잠시 시야 밖으로 밀어두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프레임 안에 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오려내는 '크롭(Crop)'이라는 과정을 비껴갈 수 없다. 대다수의 도구와 기술이 그렇듯, 크롭 역시 그 어떤 방향성도 가지지 않는 중립적인 기술이다. 마찬가지로 이 기술이 어떤 방향으로 작동할지는 오직 그것을 쥐고 있는 사람의 오랜 습관과 시선에 달려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도구를 쥔 우리는 종종 자신이 삶을 얼마나 익숙하고 한정된 방식으로 잘라내고 있는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살아간다.
세기의 미녀로 불렸던 배우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의 일화는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대상을 습관적으로 '크롭'하여 보면서도 그것을 전체라 여기는지 잘 보여준다. 과거 한 토크쇼에 드레스를 입고 출연했던 그녀는, 대화 내내 자신의 가슴 쪽으로만 시선을 던지던 앵커의 두 눈을 돌연 손으로 가렸다. 그러고는 기습적인 질문을 던졌다. "내 눈동자가 무슨 색이죠?" 앵커가 당황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초록색이에요. 제가 만난 모든 남자가 제 가슴만을 쳐다볼 때, 제 남편만이 유일하게 이 질문에 대답해 준 사람이었죠."
우리는 흔히 타인이나 세상을, 혹은 나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상은 이 일화 속 앵커처럼, 각자가 무의식적으로 지금까지 세팅해 왔던 값을 기준으로 장면을 '크롭'해 놓고 그것이 전부라 믿곤 한다. 삶을 기억하는 방식과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 안에도 동일한 방식이 작동한다. 과거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삶에 두기보다는, 현재 내가 세팅해두고 있는 기본값을 타당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방향으로 시간들을 매끄럽게 편집하여 삶의 메인 프레임 안에 걸어두는 것이다.
"사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There are no facts, only interpretations)."
그런 의미에서 니체의 이 날카로운 통찰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 즉 그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경험'을 대하는 방식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세상 어딘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있을 법한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의 나라는 존재를 지탱하기 위해 매 순간 길러낸 해석의 결과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은 순수한 사실이란,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신화 같은 가설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그 부재의 빈자리를 대신해 우리가 딛고 서게 되는 것은 스스로 직조한 삶의 맥락이 된다. 그렇기에 이 탄탄한 맥락을 흩트려버릴 수 있는 오차 범위 바깥의 상황이나 관계, 경험, 감정 등은 '자체 크롭' 과정을 거치며 교묘하게 각색되곤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갈무리한 삶의 장면들은 실제 일어난 사실의 총합이라기보다, 현재의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선택된 파편들이 잘 편집된 하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리가 세상을 단편적으로 '크롭'하며 살아가는 한계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한 예술가가 있다. 영국의 현대미술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다. 1980년대, 그가 포토 콜라주(Photo Collage) 연작인 이른바 '조이너스(Joiners)'에 몰두하며 남긴 사유는 우리 삶의 프레임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호크니는 단일한 렌즈로 찰나를 포착하는 전통적인 사진이 대상을 하나의 시공간에 가두어 버린다고 생각했다. 호크니에게 한 번의 고정된 크롭은 시간의 역동을 다 담아낼 수 없는 멈춘 단면이었다. 그는 카메라의 뷰파인더가 고정되는 순간, 우리가 보고 있는 풍경의 살아있는 맥락과 입체적인 진실이 사라진다는 점을 경계했다.
그는 이 한계를 넘기 위해 대상을 수십, 수백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잘게 크롭해 낸 뒤, 그 파편들을 기존의 질서와 다르게 엇갈리고 겹치도록 이어 붙였다. 얼굴을 정면에서 찍은 조각 옆에 턱을 틀어 찍은 조각이 붙고, 어제의 빛이 담긴 조각 아래에 오늘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일관된 원근법을 벗어나 수많은 파편이 모자이크처럼 연결된 포토 콜라주 작품들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대상의 다차원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삶의 궤적을 다루는 방식 역시 호크니의 조이너스 작업처럼 확장될 수 있다. 늘 해왔던 익숙한 방식이 아닌, 의도적으로 삶의 전혀 다른 부분들을 크롭해 보는 낯설고도 구체적인 시도를 통해서 말이다. 내가 지금껏 나를 어떤 정체성으로 고정해 왔는지 묵묵히 관조해 보는 것. 그리고 만약 평소라면 프레임 밖에 두었을 경험의 조각들을 가져와 새롭게 이어 붙인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는 것이다.
시선을 비틀어 파편들을 다른 방식으로 재조립하는 순간, 그림은 전혀 다른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크롭의 방식이 달라지면 과거의 경험을 해석하는 길이 달라지고, 내 삶을 관통하는 내러티브의 흐름 역시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된다.
세상은 늘 "삶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라고 말하지만, 때로 그 말은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문장처럼 맴돌기도 한다. 진정한 가능성은 머릿속의 상상이 아니라, 내 삶의 조각들을 다르게 편집해 보았을 때 나타나는 여러 '시나리오'들을 마주하는 순간에 열릴지도 모른다. 내가 전혀 다른 서사를 가진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눈앞에 펼쳐두고 대면하는 것. 익숙한 프레임을 허물고 다르게 조립해 보는 이 과정은, 어쩌면 삶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수많은 선택지들을 우리 스스로 감각하게 하는 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