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 2020
그 당시 LA 공항의 국내선 쪽은 비교적 많은 식당들과 기념품 상점들, 편의점 등 가게들이 다시 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봉쇄 (락다운, lock down) 상태에서 몇 달 지내다 오래간만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는 것을 보니, 이제야 사람 사는 곳에 온 것 같았다. 국제선 터미널로 가기 전에 스타벅스에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며 잠시 한 숨을 돌렸다. 비행기 출도착 현황판을 보니 몇몇 인천행 비행기들은 취소가 되는 등 난리가 났었는데, 나의 비행기는 다행히 여전히 딜레이만 되고 있었다. 딜레이라고 하다가 갑자기 취소가 되는 일들도 빈번하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제발 취소만 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국제선 터미널로 향하였다.
국제선 터미널에 도착하니 국내선 터미널과는 달리 90% 이상의 가게들의 문이 닫혀있었다. 한산하다 못해 스산했지만, 인테리어가 정말 예술이었다. Los Angeles가 '천사들'이란 뜻인데, 도시의 이름을 잘 표현한 공간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공간을 보니 마음이 아려오다 못해 슬퍼졌다. 긴긴밤을 어떻게 공항에서 지새워야 하나 막막할 법도 할 텐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면서 베이스캠프의 적당한 곳이 어딘지 물색하기 시작했다.
[베이스캠프의 조건]
1. 노트북과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가 있어야 할 것.
전자기기 사용이 일상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은 오늘날엔 필수 조건이다. 하와이에서는 공공시설에서 (설령 카페라 할지라도) 콘센트 찾기가 정말 어려웠다. 아무래도 비싼 전기값 때문일 것이라 짐작한다. 어딜 가든 콘센트 위치를 쓱-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기 때문에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찾기는 정말 쉬웠다.
2. 항공사 카운트 근처여야 할 것.
카운트 근처에는 비행기 출도착 현황판이 있다. 장시간 대기하면서 생길 수 있는 여러 돌발상황이 생기면 빠르게 대처가 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돌발상황이란 갑자기 게이트 번호가 바뀐다던가 터미널 번호부터 바뀐다던가, 연착, 지연, 항공편 캔슬 등 많은 상황들이 있다. 특히 미국 국내선은 게이트가 빈번하게 바뀌는 경우도 있다.
3. 화장실과 가까워야 할 것.
내가 화장실 가기도 편하지만, 무엇보다도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유동인구가 어느 정도 있는 곳이다. 정적인 곳보다는 유동인구가 있는 곳이 안전해 보였다. 그리고 만약 도움이 필요한데 사람 찾기가 어렵다면 언제든지 화장실 근처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만의 베이스캠프를 다 만들고 나니 마치 톰 행크스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 '터미널' 속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공항에서 밤 지새우기'는 몸이 많이 고되지만 신기하고 낭만적인 경험이었다. 내가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는가. 공항 관계자분들이 낮과 밤 상관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여기저기 꼼꼼하게 순찰하시고, 정말 세세하게 공항을 관리하고 계셨다. 마스크를 잘 끼라는 안내 방송도 밤새도록 텅 빈 터미널을 울렸다. 처음엔 마냥 신기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든 것들이 잠들만하면 깨우고 다시 잠들만하면 깨워서 몸이 너무 고단해졌다. 그저 빨리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24시간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공항에서 삶을 살아간 '크로코지아' 사람 빅터 나보스키 (톰 행크스 역)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짜증이 한 바가지에 완전 예민 덩어리로 변해버렸지만, 이것 한 가지 때문에 열 시간이 넘는 대기 시간의 피로감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것은 바로 공항에서 맞이하는 일출이었다. 동이 틀 무렵,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공항을 감싸 안고 있었다. 주위가 점점 밝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자욱한 파란 아침 안개 때문에 공항이 공상 과학 소설 속에서 등장할 법한 미래 도시 같았다. 파란 아침 안개가 연 회색빛 안개로, 그러다 흰색에 가까운 하얀 잿빛 회색으로 차츰 변하더니 빨간 해가 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 비행기와 게이트에서 '퐁' 올라오는 해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이런 일출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자욱한 안개는 학교라는 따뜻한 울타리를 벗어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정글 같은 사회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나의 모습, 떠오르는 해는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불안정한 나의 미래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건네주는 일출. 마음 저 깊은 곳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난리부르스였던 하와이 탈출기는 인천에 무사히 도착하고, 자가격리도 하와이 탈출기의 여파와 시차 적응이 맞물려서 수월하게 끝냈다. 하와이에 울면서 오지만, 하와이를 떠날 땐 울면서 간다는 말이 있다. 하와이 살이 적응 초창기 때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의 연속이었고, 나의 일상생활 패턴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 했기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막상 떠날 때가 되었고,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해서 일출을 바라보니 당분간 (어쩌면 꽤 오랫동안) 하와이의 아름다운 자연을 못 본다 생각하니 슬퍼졌다. 정말이지 하와이는 울면서 오고 가는 오묘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는 추억 조각 중 하나를 여기에 적어보니, 또다시 하와이의 아름다운 자연이 그리워진다. 내 눈앞에 하와이 신기루가 다시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