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답은 정해져있다
"요즘 일은 재밌어?"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한치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부럽다 하는데, 그 부럽다는 말에 담긴 말의 의미를 나는 잘 모르겠다. 난 이 일을 월급 150만 원 받고 시작했다. 해외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국내에 들어와 150만 원 받고 일한다는 건 미치지 않고선 가능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미친다는 건 정신이 나갔다는 뜻이 아니라 이 일에 미친다는 이야기다.
잡지사에서 일했던 1년을 제외하곤 입사 경력이 없었다. 방송 쪽은 아예 처음이었으니 그쪽에서 주는 대로 받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월급 150 괜찮아요?
네
민감한 문제니까 다른 사람들이랑 공유하면 안 돼요
네
어떻게 싫다고 하겠나.
일자리가 절박한 사람에게 싫어요, 란 죽기보다 꺼내기 두려운 말이다.
어쨌거나 월 150을 받고 시작한 일. 출근 첫날, 그 누구도 내게 퇴근하란 말이 없길래 밤 9시까지 남아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마디 말없이 먼저 간 애들이 괘씸하지만 개중엔 양심 있는 아이가 있었다.
"왜 안 가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커다란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 이국적인 외모. 허스키한 목소리.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난 그날 막차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FM성향이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친구는 내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나는 일어과, 친구는 영어과라 서로 모르는 사이었을 뿐. 빠른 년생 명분으로 한 살 깎고 입사하려던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그 친구랑 말을 놓는 바람에)
면접을 봤던 선배한테 나중에 들었지만 "한 달도 안 돼서 그만둘 줄 알았다"고 했다. 나랑 같이 입사했던 남성은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러시아 유학파였다. 그는 삼성전자에 근무하다 '내 생애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인 방송을 포기하지 못해 지원했다 했다. 그도 나도 회사에서 쉽게 받아주기 힘든 존재. 동시에 다른 애들보다 빨리 그만둘 것 같았던 존재. 하지만 아쉽게도 난 아직 다니고 있다 (그는 꽤 오래 일하다 얼마 전에 이직했다). 어쩌다 보니 그러네. 인생엔 어쩌다 보니, 로 시작되는 일들이 많다.
당시 메인뉴스 취재작가란 쉽게 말해서 기자들이 가지 못하는 현장이나 비중이 작은 업무를 도맡아 하는 역할이었다. 더불어 한 시간짜리 탐사 프로그램도 병행했다. 바빴다. 출장도 잦았다. 그래도 프로그램 끝에 바이라인 (내 이름 석자) 나가는 맛에 쉴 새 없이 일했다. 그땐 그게 그렇게도 좋았다.
몇 달 후 탐사 프로그램이 없어지고 개편되면서 코너가 생겼다. 탐사 코너. 뉴스에 빨려 들어간 거다. 기존 취재작가와 VJ들은 팀 별로 운영된다 했다. 뉴스팀에 남아서 데일리 (매일 나가는 기사)를 챙길 것인가, 비중은 줄었지만 탐사 프로그램을 맡을 것인가. 종방 하는 날 우리를 이끌던 선배가 말했다.
"최대한 본인이 원하는 팀으로 가게 해줄 테니까 나한테 개인 톡으로 보내. 탐사랑 기동 중 어디에 가고 싶은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탐사 작가로 거듭나고 싶었다. 그날그날 일어나는 이슈를 챙기는 데일리 뉴스는 단발성이 매력이란다면 탐사보도는 좀 더 호흡이 길고 깊게 파고들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한 가지 사안을 집중적으로 취재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으니까 난 당연히 탐사 쪽에 가야 했다.
마지막 방송이라고 새벽 세 시까지 술자리가 이어졌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집에 가는 길 선배한테 어떤 카톡을 보낼까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곱씹고 또 곱씹었다.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이러이러한 취재가 하고 싶고, 이런 장점을 살려 탐사팀에 일조하고 싶다. 자소서보다 공들였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단톡 방을 들어갔다. 이쯤 되면 탐사팀 발표가 났겠지. 난 어떤 기자랑 어떤 VJ랑 무슨 아이템을 취재하게 될까. 설레는 마음으로 카톡창을 열었다.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내 이름이 없다. 기자, 작가, VJ가 한 팀이 되어 총 6팀을 이루었다. 내 옆자리, 그 옆자리 작가들 이름은 다 있는데 내 이름만 없다.
나머지 인원들은 기동팀에 소속됩니다.
그랬다. 난 '나머지'였다. 내 실력이 인정받을 만큼은 안되는구나. 각 팀에 적힌 작가들 이름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그들이 나보다 어떤 점이 낫더라, 되새겼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다 나보다 오래되고 일도 기똥차게 잘하는 친구들이다. 그럼에도 원망스러웠다. 이럴 거면 위에서 조정해준다 하지, 왜 원하는 걸 말하라 했을까. 집 앞마당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눈도 팅팅 부었다. 이 회사 오고 가장 많이 울었던 날이었다.
사무실 한쪽에 쪼르르 앉은 '나머지'로 분류된 우리들은 그날부터 기동팀의 작가가 되었다. 평일 주말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다. 살면서 친구들과의 약속을 가장 많이 파토낸 건 아마도 그때가 아닐까 싶다.
퇴근 5분 전이랄지라도 사건이 터지면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괜찮은 제보가 들어오면 기약 없는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보도국 인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너나 할 거 없이 모두가 뛰어들었고 카톡방에 기동 팀장의 ㅇㅋ 가 떨어지기 전까지 퇴근이란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6개월을 보냈다.
면접 때 질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기자를 서포트해야 되는데,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였다. 난 어이없게도 그 질문을 "기자한테 스포트라이트가 가는데, 괜찮겠어요?" 로 알아들었다. 면접관은 경상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던 남성분이었다. 스, 발음이 안 되시는 분이구나, 얼토당토 않은 오지랖이 올라왔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던진 그와 나 사이,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갑분 스포트라이트?
운이 따라준 덕분이겠다. 맥락상 틀린 답은 아니었고 난 합격 문자를 받았다.
면접 질문의 의도를 비로소 알게 됐던 건 기동팀 작가로 보낸 6개월이었다. 저 현장 내가 다녀왔는데 뉴스가 나가는 1분 30초 영상 속 그 어디에도 내 흔적이 없다. 그건 꽤나 허무한 일이기도 했다. 현장에서 영상을 쏘고 당일 기사가 나가는 일이 허다했다. 출장지가 지방일 경우 회사에 도착하는 건 새벽 두 세시. 조수석에 앉아 생방송 뉴스를 챙겨봤다. 어쩌다 내 뒷모습 (대부분은 인터뷰이를 붙잡는 구질구질한 모습) 이 화면에 나오기라도 하면 방송 탔다며 물개 박수. 그런 낙에 살았다. 정말 작은 것에 목숨 걸고 기뻐했던 것 같다. 경찰 브리핑, 잠입취재, 몰카, 뻗치기. 매일 다이내믹한 일들을 겪었던 덕분일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분명한 건 그때가 아니었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일이라는 거다. 보도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보자들은 어떤 심정으로 수화기를 드는지, 카메라맨은 어떤 고충을 겪는지, 기자들은 어떤 시스템에서 살아가는지, 기사가 어떻게 쓰여지는지. 잠깐이었지만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다.
보도국 생태계를 알고 나니 지금 이 일이 조금은 수월하달까. 바라보는 관점도, 받아들이는 이해의 폭도 조금은 넓어졌달까. 이 일에 애정이 생긴 데엔 그 6개월의 힘이 크다. 엄밀히 말하자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생긴 애정일 거다. 피디와 기자, 작가는 영역이 언뜻 겹칠 수 있겠지만 관점이 다르다. 그런 면에서 기자들의 성향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고 겪었다는 건 내게 큰 가치를 안겨준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늘 생각한다. 세상 떠나갈 것처럼 울었던 그날. 내 실력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서러움. 평가받지 못했다는 좌절감. 돌이켜보니 그 시간은 꼭 내게 필요했던 것이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더라도 길게 보면 다 뜻이 있다는 걸, 그렇게 깨달았다. 그러니 매일 하는 이 일이 재미 없을 수가 없다. 월급은 여전히 쥐꼬리만하지만. 돈으론 이 행복을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