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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Mar 05. 2020

백록담에서 만난 아빠

2019년 1월,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다. 대운이 따라줘야 가질 수 있다는 맑은 하늘 아래 자연의 경이로움을 눈에 담고 내려왔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운무도, 하산길을 가득 메운 설경도. 다시 와도 이보다 좋을 순 없겠다, 산에 오른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날의 여정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다른 곳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먼저 내려오시죠"

"어디서 오셨어요"

"이것 좀 드세요"

"제주에 얼마나 계세요"


아껴뒀을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요기거리를 두어 개씩 손에 쥐어주는 인심 좋은 아버님들. 미끄러질까봐 낑낑댈 때면 손을 건네주던 어머니. 고지를 앞에 두고 헉헉거리는 우리에게 열 발자국만 더 가면 끝난다며 용기를 북돋아주던 세 명의 가족. 앞만 보고 오르면 모르고 지나칠 법 한 소소한 풍경을 알려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요기 옆에 가봐요, 상고대가 기가 막혀요?"  


여행지에선 낯선 타인과도 이유 모를 동지애를 느낀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느닷없이 초콜릿을 건네진 않을 테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 힘들어 보인다고 선뜻 제 손 잡으세요,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여행지에선 다르다. 우리 모두 여행자, 라는 암묵적인 인식이 상황판단을 단순하게 만들어준다. 길을 묻는 것도 도움을 건네는 것도 한결 수월해지는 마법 같은 현상. 나는 그 맛에 여행을 한다.  


어렸을 적부터 가족여행을 많이 다녔다. 어린 나와 황토색 프레스토(당시 차종)만 있으면 엄마 아빠는 어디든 갈 기세처럼 보였다. 잦은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아빠의 부재와 나를 향한 미안함이 우리 가족을 전국 곳곳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떠난 여행지에서 난 늘 아빠 손을 잡고 졸졸 따라다녔다. 아빠는 모르는 게 없었다.


"화개장터가 왜 화개장터인 줄 아니?"

"이 꽃 좀 봐봐. 돌 틈 사이에서 피어났어. 생명력이 강하지?"

"섬진강에선 재첩국을 먹어봐야 돼. 이거 강에서 손으로 일일이 줍는 거야."

"오늘 오일장이 열린대. 여기 마을 오일장이 크고 유명하거든. 한 번 가보자"

"이건 개불이라는 거야. 아빠는 좋아하는데 너도 한 번 먹어볼래?"


틈만 나면 뭐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아빠가 좋았다. 뒷좌석만 타면 곯아떨어지는 나를 바다가 보인다며 굳이 깨우던 아빠도. 감자전을 먹으러 가면 막걸리를 시켜서 한 잔 먹어보라던 아빠도. 술은 아빠한테 배우는 거라며 바닷가에서 해삼과 소주를 시켜놓고 한 잔 따라보라던 아빠도. 내게 여행이란 아빠 그 자체였다.


아빠는 크고 거대한 것보다 작고 소소해서 자칫하면 스쳐 지나갈 법한 장면을 잘 찾아내곤 했다.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청설모나 겁이 많아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고 저 멀리서 눈만 껌뻑 껌뻑 뜨고 있는 사슴가족을 발견하는 건 늘 아빠였다. 건봉사의 들판에서 목탁 치는 스님을 보며 한 폭의 그림 같다고 사진 한 번 멋지게 찍어보라 주문했고. 예고 없던 소나기가 내리면 이런 비쯤은 맞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먼저 걸어 나아갔다. 화장실이 급하다 하면 가겟집에 들어가 화장실 좀 빌려주세요, 말 붙이는 넉살도 필요하니 다녀오라 등 떠밀어주었다.


어느덧 여행지에서 나는 오가며 스치는 모든 이들과 말을 섞고 있다. 한라산은 어쩌면 어느새 그렇게 아빠를 빼닮은 모습으로 자라 버린 나를 처음 인지했던 여행이기도 했다. 어쩌다 같이 오르게 된 삼촌뻘 아저씨들이 "뭐야, 같이 가던 친구 먼저 올라갔어?" 물어보면 "도망갔어요. 나빴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고. 하산하는 길 "한참 남았어요?" 누가 물어오면 "아유 거의 다 왔죠. 근데 요 옆에 가보세요. 상고대가 예뻐서 사진 찍기 좋아요" 장터의 이모마냥 능글맞은 뻔뻔함도 생겼다. 같이 여행하던 친구에게 저기 좀 보라며, 예쁘지 않냐며 쉴 새 없이 손가락을 가리키는 스스로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였다면 어디부터 봤을까. 아빠라면 뭘 찾아냈을까. 그때의 아빠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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