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야구인생

by 알로

"야구를 안다는 건...

선수나 룰을 안다고 야구를 아는 건 아니거든요."


그가 운을 띄웠다.


"저한테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죠. 내가 뭐 하나 좋아하고 나서 이제 그걸 잘 안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찾아오잖아요. 저는 고등학교 때 딱 그랬어요. 아, 나 야구 좀 안다. 왜냐면 기록을 다 꿰뚫고 있었으니까. 제가 9살 때부터 아버지 따라 야구장을 다녔거든요. 청보 핀토스 있었던 시절이에요. 들어본 적 있으시죠? 청보 핀토스."


청보 핀토스는 프로야구팀 중 마지막으로 창단된 팀이자 지금은 없는 전설의 삼미 슈퍼스타즈다. 나는 몰랐다. 왠지모를 청포도가 아른거렸을 뿐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검색해봤다.


"아버지가 야구장을 좋아하셨어요. 저는 맨날 아버지 따라갔죠. 야구는 매일 봤어요.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나 야구 좋아해. 나 야구 맨날 봐. 나 야구 잘 알아. 저는 지금도 다 기억해요. 양준혁이 1998년도에 그때가 삼성에 있었던 마지막 해인데 그때 타율이 0.342였어요. 검색해보세요, 아마 맞을 걸요? 2005년도에는 0.261. 궁금한 거 다 물어보세요. 누가 몇 년도에 타율이 몇이었나, 이런 건 다 기억해요. 3000안타, 이거 하나만 가지고 1시간을 말할 수 있어요."


신난다는 듯 웃는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표정부터 다르다. 그는 스포츠 일간지에서 십 몇 년을 지내다 방송사로 이직해 스포츠부, 그 중에서도 야구를 담당했던 야구 전문기자다. 하지만 그가 머나먼 기억 속 양준혁의 타율까지 끄집어내며 말하고자 했던 건 야구에 대한 지식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스포츠 전문 기자들이 야구팀을 담당하잖아요. 한 3년 정도 되잖아요? 그러면 감독들한테 훈수를 두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아이, 감독님. OOO선수 넣지 왜 뺐어요. 야구를 이렇게 하시라니까.' 그러면 감독들이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요? '자네 야구 기자 한 지 얼마나 됐나?' 물어봐요. '예, 저 3년 됐습니다.' 그러면 감독님이 허허허 하고 성격 좋게 웃으시면서 그러신대요.


"난 50년을 했는데... 아직도 야구를 모르겠어.'"


이것은 비단 야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숱한 날, 수많은 것들에 대해 아는 척, 들어본 척, 내 눈엔 다 보이는 척, 해온 지난 날에 대한 반성의 시간이다. 부끄러운 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웃고 있었지만 양심이 콕콕 찔렸다.


"야구라는 게 굉장히 합리적인 스포츠거든요. 저는 야구가 참 좋아요. 그런데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기자라면 야구를 통해서, 야구라는 스포츠를 통해서 인생을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이 모든 대화는 "이병규가 왜 대단한 선수였을까요?"라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이쯤되니 이병규라는 이름을 꺼낸 것 자체가 그에겐 내 덜컹거리는 빈 수레 좀 봐달라 외치는 꼴이었다. 나는 그의 앞에서 아는 척은 커녕 맞장구조차 섣불리 칠 수 없는 야알못이었다.


사무실에서 5월 5일 프로야구 개막전을 두고 잠깐의 야구 이야기가 오갔고, 하필 우리의 화두는 LG였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는 라뱅이라 불리는 이병규였다. 재작년까지 현역이었던 그는 작년부터 LG팀 코치를 맡고 있다.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고 말해오면서도 그저 경기장에 열 번 정도 가 본 게 다인, 그것도 야구보다 응원이 좋아 찾았던 사람이다. 선수 이름 나염 박은 유니폼을 즐겨입던 사람이다. 이병규 선수에 대해서도 활약상을 꿰뚫기보다는 그저 멋있어서, 팀의 맏형이라 듬직해서, 잘생겨서, 잘 치니까 등등의 이유로 좋아했다.


"작가님도 야구 좋아하시니까 잘 아시겠지만 (여기서 이미 고개가 숙여졌다) 이병규 선수가 데드볼 헌터잖아요? (몰랐다) 스트라이크존에서 벗어난 공을 던지면 데드볼인데, 그걸 다 치는 거예요. 유소년들은 치지말라고 배우거든요. 치면 혼나요. 적은 확률에 거는 거니까. 그런데 이병규는 그걸 다 치는데 또 잘쳤죠. 그래서 데드볼 헌터거든요. 이치로도 데드볼 헌터예요."


작가님도 야구 좋아하시니까 잘 아시겠지만, 은 그가 나의 기분과 입장을 배려해 건넨 말이었다. 그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걸 표정에서 읽었을 거다. 친절한 설명과 함께 이해하기 쉬운 인물인 (누구나 알법한) 이치로를 갖다 대며 깔끔하게 설명을 매듭짓는다. 야구를 잘 모른다 할지언정 사람과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법만큼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3000안타를 가지고도 한 시간을 말할 수 있다던 그는 왜 선수가 일생에서 안타를 3000번 치는 게 어려운 일인지, 메이저리그에 안타를 3000번 치는 선수가 몇 명 정도 되는지, 3000번의 안타를 가지고 만든 영화가 어떤 내용으로 흘러가는지,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쿠세, 라는 단어가 일본어에서 나온 말이죠? 묻는다. 맞다고 끄덕였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 변화구랑 직구가 있어요. 변화구를 던질 땐 손을 이렇게 돌리고 직구를 던질 땐 손이 이런 방향이 돼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죠? 그런데 프로니까 아무래도 티 안 나게 하겠죠? 그런데도 그게 읽히는 거예요. 누가 읽느냐. 안타를 3000번 치는 타자들은 그걸 읽어낼 수 있다는 거예요. 영화 미스터 3000에 '쿠세'가 나와요. 그때 생각했어요. 아, 시나리오 작가가 야구를 정말 잘 아는 사람이구나."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야구를 모른다고 말한다. 9살 때부터 30년 넘게 야구를 봐왔고 15년 가까이 사회인 야구단에서 유망주 타자로 뛰는 그가 말이다.


국내 프로야구팀에서 응원단으로 일했던 지인들이 주변에 몇 있다. 그들은 나름 매 시즌마다 야구경기를 (강제적으로) 지켜봐야 했던 입장이었고, 자타공인 야구 전문가들이다. 20대 때 그들과 함께한 술자리는 늘 야구 이야기로 채워졌었다. 모르는 야구 이야기는 죄다 그들에게 물었었다. 그중 최근 만난 한 명에게 물었다.


"쿠세라는 게 있다던데 알아? 무슨 변화구 직구할 때 손 모양을 두고 부르는 표현이라던데. 투수의 버릇 같은 거."

눈이 동그레 진다. 처음 듣는 눈치다.


그와의 대화가 한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던 건 아마도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때문이었을 거다. 내가 전문으로 하는 분야에 대해 한 시간 동안 신나게 말할 수 있을까. 작년 가을, 우연한 기회가 닿아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특강에 나갔던 적이 있다. 내 회사, 내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아이들에게 흥미를 유도하는 자리였다. 90분. 고작 90분을 말하기 위해 난 일주일 동안 PPT와 사투를 벌였고 또다른 일주일은 긴장과 싸웠다. 이제와 보니 그때의 나는 자리를 즐기지도 못했을뿐더러 진정한 내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 마시며 잠깐 나온 야구 이야기에 한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두 눈을 반짝거리며 한시도 다른 생각을 못할 만큼 야구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의 입담은 새삼스럽게도 멋있었다. 그의 전문성과 탁월한 이야기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야구를 모른다 했지만, 나는 그의 잡담 섞인 야구 이야기에서 인생철학 한 가지를 배워왔다. 무언가에 대해 안다는 건 이런 거구나. 아니라 부정했지만, 그는 이미 야구로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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